[문학예술]‘나는 유령 작가입니다’

  • 입력 2005년 5월 28일 07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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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 작가입니다/김연수 지음/266쪽·9500원·창비

이 작품집은 단편 9편을 싣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춘향’ 이야기다. ‘춘향전’ 본전(本典) 에 가려 빛을 못 보던 외전(外典) 같은 작품 ‘남원고사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이다. ‘본전’보다 더 문제적인 인물들을 만들어 내고, 한시를 번역한 듯한 빼어난 의고체 문장들로 이들을 조형(造型)해 낸 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글에 나오는 칼 쓴 춘향이와, 옥을 지키는 군뢰사령, 변학도 부사는 우리가 알던 이들이 아니다. 춘향이 마음만 열어 준다면 변 부사가 어떤 형극의 길도 갈 수 있다고 매달린 데 대해 춘향은 어쩐지 애잔한 마음이 고여 든다. 두목(杜牧)의 아름다운 시들을 처음 읊어 보인 사람이 이몽룡이 아니라 변학도였다면 도대체 그녀는 누구를 위해 수절했을지 모를 상황이다. 군뢰사령은 “도대체 어떤 수령 아들이 국가 재산인 관기(官妓)와 가약을 맺었다는 이유로 신분을 함부로 바꿔 줄 수 있느냐”는 입장이다. 변 부사를 급습한 어사는 “그런 일로 수령 목을 치면 남아날 팔도 수령이 몇이나 되겠느냐”는 위로까지 한다.

또 다른 단편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는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의 등반일지를 쓰는 소설가가 나온다. 그가 깨닫는 것은 문장으로 남길 수 없는 일들이 삶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인과관계에 어긋나는 일들은 문장으로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아귀가 맞는 교훈을 던지는 설교들보다 그늘진 데서 내려오는 외전에 더 진실이 있을지 모른다. 아니, 외전이라고 해서 삶의 전모를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을까? 그것이 버젓이 기록된 것인 한.’

이 작품집이 던지는 문제의식이다. 이 책에 실린 또 다른 역작의 제목 ‘뿌넝숴(不能說)’는 피와 욕망을 한몸에 지닌 인간의 삶은 절대 언어로써 ‘말해질 수 없다’는 중국말이다.

김연수(사진) 씨는 작가의 말에 “1인칭. ‘나’. 내 눈으로 바라본 세계. 이제 안녕이다. ‘나’로만 구성된 소설집을 쓰고 싶었다”고 써 놓았다. 그는 스스로를 ‘유령 작가’라고 부르고 있다. ‘눈에 보이는 몸을 아직 갖지 않은 작가’란 뜻이다. 그는 오히려 그런 ‘유령 작가’야말로 알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한 이 세계를 더듬고 살펴보는 데 더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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