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66>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5월 25일 03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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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어제 비록 적은 안간힘을 다 써 우리 군사를 막아냈으나, 그 날카로운 기세에 간담이 서늘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움직이면 또다시 전력을 끌어내 맞서 올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어둠을 틈타 성벽에 구름사다리 몇 개만 기대놓게 한 뒤 일시에 횃불을 밝히고 든든한 방패를 든 군사 약간을 함성과 함께 성벽 쪽으로 밀고 들게 하십시오. 그러면 적은 다시 우리가 어제처럼 전군을 들어 야습을 온 줄 알 것입니다. 크게 놀라 활과 쇠뇌의 살(矢)이며 성벽 위에 마련해둔 돌과 통나무를 있는 대로 퍼 부울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물러나고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우리는 군사를 더 상하지 않고도 성안의 물자를 소모케 하고 적의 심신을 고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어제 성을 공격하다 죽은 우리 군사들의 목숨 값입니다.”

범증이 그렇게 말해 패왕에게 자신의 계책을 내놓았다. 패왕의 타고난 전투 감각도 그 말을 얼른 알아들었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 말을 따라주었다. 패왕의 무시무시한 전투력과 범증의 빼어난 병략이 다시 배합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밤 삼경 무렵 패왕은 범증이 시키는 대로 사방으로 군사를 내어 형양성을 들이치는 척했다. 성벽의 한군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성벽으로 다가오는 초나라 군사들에게 화살을 퍼붓고 돌과 통나무를 굴렸다. 횃불이 밝다 해도 성벽 아래는 잘 보이지 않아 구름사다리가 걸쳐져 있는 곳이면 무턱대고 끓는 물과 기름을 쏟아 붓기도 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초나라 군사들이었다. 전날 싸움으로 겁을 먹었는지 성벽 아래에서 함성만 지르며 오락가락 할 뿐 사다리를 기어오르는 군사들은 없었다. 하지만 전날 급한 지경까지 몰려 본 한군이라 끝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새벽까지 초나라 군사들의 함성에 쫓기다가 날이 훤히 밝은 뒤에야 겨우 성가퀴에 기대 눈을 붙였다.

다음날 아침 해뜨기가 무섭게 패왕은 다시 한번 군사를 내어 성을 치는 시늉을 했다. 이번에는 낮이라서 한군의 눈을 속이기 어려웠으나, 그래도 크게 군사를 상하지 않고 한나절 한군을 모두 성벽 위로 끌어내 고단하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성안의 한군도 무언가 초나라 군사가 달라졌다는 것은 눈치를 챘다.

“어째 초군의 움직임이 전과 같지 않구려. 간밤에도 함성만 질러대더니 지금 또 구름사다리만 성벽에 걸쳐놓았을 뿐 기어오를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지 않소? 방패 밑에 숨어 화살만 쏘아붙이고 있는 품이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소. 자방 선생은 어떻게 보시오?”

장졸들과 마찬가지로 간밤을 뜬눈으로 새우다시피한 한왕 유방이 성벽 위를 둘러보다가 뒤따르는 장량을 보고 물었다.

“우리를 속이기 위한 거짓된 움직임(陽動)입니다. 아무래도 범증이 꾀를 낸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 군사들은 밤낮없이 적의 속임수에 끌려 다니며 눈 한번 제대로 붙여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줄곧 성밖 초나라 군사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눈치이던 장량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그렇게 대답했다. 한왕이 그렇다면 별일 아니라는 듯 시원스레 말했다.

“그럼 장졸들에게 명을 내려 저들을 못 본 체하게 하면 되지 않소?”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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