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앎과 엔터테인먼트의 만남

  • 입력 2005년 5월 11일 1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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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 동(東)!” “바람 풍(風)!” “살 활(活)!”

아들의 유치원 소풍에 따라갔다가 또래끼리 흥미로운 게임을 벌이는 것을 봤다. 200만 부가 넘게 나갔다는 만화책 ‘마법 천자문’의 한자(漢字)로 내기를 하는 게임이었다. 서로 한 글자씩 말하다가 더 이상 상대하지 못하면 지고, 나중에 다른 아이가 끼어들기도 했다.

어릴 때 기자도 비슷한 게임을 했다. 영어사전을 아무 데나 펴고 단어를 알아맞히는 내기였다. 시험공부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수업 때보다 오래 기억됐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뜻은 문자 그대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아는 것이 즐거움’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힘이라는 말이 앎을 지나치게 부담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앎과 엔터테인먼트(오락)가 유독 단절돼 있다. 오락의 영역에선 앎이 부족하고, 앎의 영역에선 오락이 천박하다고 내려다본다.

대중문화가 시대의 거울이라는 말은 문화이론의 명제이지만, 팬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의문이다. 가수 조영남이 당한 뜻밖의 봉변처럼 대중 스타에 대한 관심도 일방적인 비난이나 찬사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또 대중문화를 취재했던 경험에 비춰보면, 자신의 연기나 노래를 ‘시대’라는 프리즘으로 설명할 수 있는 스타들은 손꼽을 정도다.

앎의 영역에 있는 이들은 또 어떤가.

미술 전시 도록에 있는 평론은 ‘그들만의 코드’로 쓰여진다. 평론가들이 자신의 앎을 앞세운 탓이지만, 이래서야 애호가에게 앎의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 가요를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음반을 낸 한 음대생이 기자를 찾아와서는 “교수님께 혼난다”며 익명을 고집했던 일도 겪었다.

국내 학계도 대중적 글쓰기에 인색하다. 물론 학문을 천착하는 학자의 고뇌를 대중이 짐작하기 어렵지만, 그 결실을 전하는 일은 학자의 소임이기도 하다.

정옥자 서울대 교수는 칼럼집 ‘오늘이 역사다’의 서문에서 “교수로서 독자와 대화할 수 있는 길은 잡문(雜文·논문 이외의 글) 쓰기”라며 “공부하다보면 똑똑 떨어지는 여적(餘滴)과 같은 사색의 편린이나 국가 전반에 걸친 문제의 조망과 비판의식은 논문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썼다. 사회생물학을 창시한 미국의 에드워드 윌슨이 가정교사를 두고 대중적 글쓰기를 공부했다는 일화는 귀담아들을 만하다.

그래서 요즘 자라나는 세대가 앎을 즐기는 행태를 ‘가볍다’고만 탓할 일은 아니다. KBS ‘도전 골든벨’(1TV) ‘스펀지’(2TV)나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오늘의 시사퀴즈’ 등에서 그들은 앎을 즐기고 있다. 앎을 게임처럼 갖고 노는 것이다.

특히 초등학생들도 인터넷에서 가상 소설 쓰기를 즐긴다. 인천 인주초등학교 4학년 송하람 양은 “꿈꿔온 것을 이야기로 쓰니까 우선 재미있다.”고 말했다.

TV가 없던 시절, 소설 읽기는 오락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락 매체로 비난받던 TV가 발 빠르게 ‘지적 오락물’을 내놓는 것처럼, 학계와 예술계도 앎의 즐거움을 대중에게 전하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음주가무를 즐기는 어른보다 아이들이 앎의 즐거움을 기다리고 있다. 앎과 엔터테인먼트의 ‘융합’이 시작된 것이다.

허엽 위크엔드팀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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