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1년 佛미테랑 대통령 당선

  • 입력 2005년 5월 9일 19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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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골 이후 프랑스 현대정치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지도자로 평가받는 프랑수아 미테랑이 1981년 5월 10일 대통령 선거에서 대권 도전 세 번 만에 승리했다. 서른 살에 정치에 입문, 대권 도전 16년 만에 엘리제궁에 입성해 무려 14년을 재임한 미테랑. 그는 드라마틱한 정치 역정을 걸었다는 점 외에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었으면서도 사적인 욕망을 희생시키지 않은 삶의 ‘절묘한 기술자’였다.

미테랑은 청년시절엔 극우파였다가 사회당 당수로 대통령이 되었다.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야심 차게 폈지만, 이것은 5년 뒤 사회당이 의회선거에서 지는 결정적 패인으로 작용한다. 이에 따라 미테랑은 경쟁과 이윤을 우선시하는 자유시장 경제정책을 적극 도입했고 급기야 우파인 자크 시라크를 총리로 앉히는 파격을 단행한다. 프랑스 역사상 최장수 대통령이라는 기록 이면에는 이처럼 대중의 마음을 읽는 본능적 감각과 변신이 있었다.

여기에 미테랑은 엘리제궁이라는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하면서도 애인과 딸을 두고 병(病)까지 숨기는 자유자재의 생을 살았다. 그는 50대 야당 사무총장 때, 훗날의 ‘숨겨놓은 딸’의 어머니인 팽조를 만난다. 당시 팽조는 고교생이었으며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의 딸이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를 눈치 챈 팽조의 아버지가 딸에게 금족령을 내리자 미테랑은 쉰 넘은 나이에 팽조 집 앞에서 “연인을 만나게 해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재임기간 내내 애인 집으로 퇴근해 본부인과 두 아들보다 숨겨놓은 모녀에게 시간을 더 쏟았다. 말년에는 대통령 전용기로 이들과 함께 여행을 다녔으며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숨겨놓은 딸 마자린에게 공식적으로 자신의 유산 관리를 부탁하기도 했다. 대학교수에 유명 소설가로 성공한 마자린은 “대놓고 아빠라 부를 수는 없었지만 매일 저녁 대화를 나눠 다른 집 아이들보다 훨씬 더 아빠와 친했다”고 말했다.

미테랑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전립샘(전립선)암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이 사실을 숨기고 수차례 수술을 받아가면서 직무를 수행하고, 퇴임한 뒤 79세로 생을 마치는 초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모든 연설 원고를 직접 쓸 정도로 탁월한 문장력까지 갖춰 15권의 저서까지 낸 저술가이기도 했던 미테랑. 개인은 문화의 산물이듯 미테랑 역시 프랑스 문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했으면서도 그 권력에 짓눌리지 않았던 그의 삶의 태도는 아직도 세계 뭇 남성들에게 질시와 부러움의 대상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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