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희]맞불과 지도력

  • 입력 2005년 4월 29일 18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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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신입생 시절에 배우는 논리학에 ‘논점 변경의 오류’라는 것이 있다. 논란의 핵심을 비켜가 딴 얘기를 하면서 마치 그것이 진짜 핵심인 양 주장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토론 중에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너, 나이가 몇이냐”고 한다든가, 부부싸움을 하다가 “당신은 뭐 잘했다고…”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대학생쯤 됐으면 말하거나 글 쓸 때 이런 유치한 단계는 벗어나야 한다는 취지로 가르치는 것이겠다.

지금 일본이 그 덫에 걸려 있다. 자기 나라 역사교과서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 그렇게 말하는 너희 나라 교과서는 괜찮은지 따져보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명민하다는 일본 외무성 관리들이 검증 대상으로 지목한 20개국 중에는 한국도 들어 있다.

우리 역사 교과서? 당연히 문제가 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우리 교과서에 소개된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연행자 수는 허수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실관계의 논란뿐이 아니다.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대(大)한국주의’ 성향에 기울어지고 ‘민족주의 사관’에 기반을 두고 있어 “자기 민족을 객관화하기 힘들다”는 뼈아픈 지적도 있다. 일본 일각의 뜻있는 역사학자들의 고언이다.

남 얘기를 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찰적 역사 인식, 자신에게 더욱 엄격한 학문의 잣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역사 인식도 이런 식으로 재검토의 초입에 서 있는 것 같다. 일본 역시 자신의 과거를 성찰적으로 돌아봐야 할 때다.

오죽했으면 같은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인 독일의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가 “일본은 우방이 별로 없다”고 안타까워했겠는가. 한때의 ‘귀축미영(鬼畜米英)’을 오늘의 ‘빅 브러더’로 모시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주변 나라의 뇌리에 아직껏 생생한 반세기 전의 악행을 내팽개쳐 둔 채 몇 푼의 원조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사려 하는 한 단언컨대 우방은 생기지 않는다.

‘본래의 논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웃들이 아프다고 아우성인데 ‘넌 아파선 안돼’라거나 ‘나한테는 아프다는 소리 하지 마라’고 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친구를 얻는 길도 아니다. 난징과 하얼빈과 남양군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시해야 한다. 지구촌의 ‘영원한 외톨이’로 남지 않으려면.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정치와 국익의 세계에선 이런 자성의 촉구가 무력할 수도 있다. 항용 “당신은…” 하는 식의 맞불작전이 위세를 떨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맞불’은 너무 유치해서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웃들의 ‘세습적 희생자 의식’과 일본의 ‘우경화’가 맺고 있는 적대적 의존관계를 강화시킬 뿐이다. 이런 마당에 일본이 유엔의 중책을 맡는다고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유엔에 전후(戰後)질서 개편 논의가 한창인 요즘이 일본으로서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이 ‘정글’에도 ‘편협한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함께 가자’고 손을 내미는 이웃이 많지는 않지만 아직은 있다. 더 늦기 전에 그 손을 맞잡을 수는 없을까.

김창희 국제부장 ins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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