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장군 녹둔도 백의종군때 ‘장수’ 신분이었다

  • 입력 2005년 4월 17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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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8년 1월 여진족 토벌전이었던 ‘시전부락 전투’ 실황을 그린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아랫부분에 참전장수들의 명단이 실렸다.사진 제공 송우혜 씨
1588년 1월 여진족 토벌전이었던 ‘시전부락 전투’ 실황을 그린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아랫부분에 참전장수들의 명단이 실렸다.사진 제공 송우혜 씨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발발 4년 전인 선조 21년(1588년) 두만강 북쪽 녹둔도에 침공했던 여진족들을 토벌하기 위한 전투에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참전했다. 이때의 백의종군은 ‘병졸로 강등되어 복무하는 형벌’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보직해임’이었을까. 당시의 전투를 생생히 그린 그림자료를 발굴한 소설가 송우혜 씨가 이 그림 분석을 통해 백의종군의 의미와 이순신-원균의 관계를 밝히는 글을 보내왔다.》

조선시대 무관에 대한 처벌이었던 ‘백의종군’의 실체는 과연 어떠했던가. 현재 우리 문화계와 학계는 이순신 장군이 두 번 겪었던 백의종군은 ‘장수가 병졸로 신분이 강등되어 복무하는 치욕적 형벌’이라는 다수설과 ‘단순한 보직 해임조치로서 장수의 신분을 유지한 채 복무하는 가벼운 처벌’이라는 소수설로 갈려 있다.

그런데 백의종군의 실체를 극명하게 밝혀주는 전투도가 발굴되었다. 선조 21년(1588년) 1월 함경도 북병사(北兵使·종2품) 이일(李鎰·장양공)이 지휘한 여진족 토벌전이었던 ‘시전부락 전투’ 실황을 그린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105cm×140cm·육군박물관 소장)라는 제목의 채색화이다.

이 전투도는 외적과의 전투에 참전했던 조선군 장수들 전체의 명단과 직책, 편제를 완벽하게 기록해 놓은 조선 역사상 유일한 사료다. 이순신을 비롯한 50여 명의 참전 장수가 확인되는데, 그들은 4년 뒤 발발한 임진왜란에서도 조선군의 중추가 되었다.

이순신은 함경도 조산 만호(종4품)로 근무하던 선조 20년(1587년) 9월에 겪은 ‘녹둔도 전투’ 때문에 백의종군의 처분을 당했다. 그로부터 4개월 뒤 조정의 명으로 이일이 녹둔도에 침공했던 여진족을 크게 토벌한 것이 ‘시전부락 전투’였다. 당대의 사료들에 “이순신은 시전부락 전투에서 세운 전공으로 백의종군의 처벌에서 풀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도는 현재 우리 사회가 범한 역사의 오류들을 명쾌하게 바로잡아준다.

첫째, 이순신은 백의종군할 때 ‘장수’의 신분이었다. 당시 해임되어 현직이 없었던 이순신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임을 가리키는 ‘급제(及第)’라는 칭호 아래 ‘우위, 좌화열장(左火烈將)’으로 참전했다.

둘째, 현재 ‘원균 명장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추측에 의해 “육진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였던 원균이 시전부락 전투를 지휘해서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종성도호부사(약칭 종성부사·종3품)였던 원균은 ‘우위, 1계원장(一繼援將)’으로 참전해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과 동급의 장수로 싸웠음이 밝혀졌다.

당시 조선군은 2700여 명의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눠서 토벌전을 벌였다. 총지휘자인 대장 이일이 거느린 본대는 지휘부였고, 실제 공격은 좌위(左衛:장수 22명, 위장-회령부사 변언수) 부대와 우위(右衛:장수 24명, 위장-온성부사 양대수) 부대가 맡았다. 이순신과 원균은 이때 우위 부대를 지휘한 위장(衛將)인 온성부사 양대수(楊大樹)의 수하 장수들이었다.

싸우는 전사들의 움직임이 생생한 한 장의 채색 전투도가 400여 년 전 역사의 실체를 선명하게 후세에 전하는 모습은 장렬하기 짝이 없다.

송우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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