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고려 광종 첫 과거시험

  • 입력 2005년 4월 15일 18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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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천하의 호걸들이 모두 내 품안에 들어왔군.” 598년 중국 당나라 태종은 과거시험에 모여든 전국의 수재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이로부터 360년이 흐른 958년 4월 16일 고려 광종의 얼굴에도 비슷한 미소가 흘렀으리라. 이날 우리 땅에서 처음으로 과거시험이 치러졌던 것. 광종의 의도는 객관적인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해 왕권을 강화하고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그 뒤 1894년 폐지될 때까지 1000여 년 동안 과거제도는 사대부들에게는 국가가 보증하는 입신양명의 길이었다.

과거제는 한국,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몇몇 국가에서만 실시됐다. 전근대 사회에서 시험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것은 극히 드문 현상이었다. 일본과 서구 봉건사회는 무력과 재력을 소유한 계급이 지배했던 반면 한국은 문인이 득세하는 사회로 자리 잡았다.

벼슬길에 오르려면 과거시험을 거쳐야 했기에 부정과 비리로 관문을 통과하려는 사람들이 생겼다. 타락상은 조선 후기에 절정에 이르렀다.

예상 답안지를 미리 만들어 가는 것은 기본이요, 글 잘하는 사람에게 대리답안을 작성하게 하고 시험관을 매수해 답안지를 바꿔치는 수법이 유행했다. 시험장 밖으로 통하는 땅굴을 판 뒤 문제를 적은 대나무통을 내려보내면 밖에서 답안을 작성해 다시 보내주던 것은 오늘날의 휴대전화를 이용한 부정행위에 버금가는 절묘한 수법이었다.

제도의 타락만이 문제였을까. 전형방식 자체도 창의적 엘리트 육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비고사와 본고사의 2단계 방식으로 치러진 고려와 조선의 과거제도는 사서삼경, 춘추, 사기 등 중국 고전을 해석하고 이를 토대로 글을 짓는 능력을 평가했다. 중국사상에 대한 지식을 평가해 한국 관리를 선발하는 것도 난센스였지만 이렇게 골머리를 썩이며 공부했던 내용이 나중에 관료로 활동하는 데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조선후기 실학자 박제가(朴齊家)는 한탄했다.

“과거시험 문장은 조정 운영에 쓸 수 없고, 임금의 자문에도 응용할 수 없다. 어린아이 때부터 과거 문장을 공부해 머리가 허옇게 된 때 과거에 급제하면 그날로 그 문장을 팽개쳐버린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다. 우리시대의 획일적인 대학입시와 정형화된 고시제도에 대한 비판과 너무도 비슷하지 않은가.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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