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21년 첫 여성서양화가 나혜석 데뷔展

  • 입력 2005년 3월 18일 1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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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첫 여성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의 첫 개인전이 1921년 3월 19, 20일 경성일보사에서 열렸다. 관람객 5000여 명이 찾았고 그림 20여 점이 팔렸다.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그의 삶은 찼다 기울고 다시 차오르는 달처럼 도약과 위축을 반복했다.

1896년 수원에서 재력가의 딸로 태어난 그는 진명여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사랑 최승구(崔承九)를 만났다. 이 무렵 정월은 ‘무한한 고통과 싸우며 예술에 매진하겠다’는 글을 남겼다. 예술에 대한 이런 태도는 최승구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첫사랑은 최승구가 병사하면서 끝났다.

귀국 후 그는 법조인 김우영(金雨英)과 결혼했다. 남편은 미술 활동을 적극 후원했지만 정월의 ‘감성’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정월은 1922년 만주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만주로 갔다. 그해부터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입선했지만 갈수록 한계를 느꼈다. 그는 “기교만 조금씩 진보할 뿐 정신적 진보가 없어 나 자신을 미워할 만큼 괴롭다”고 말했다.

‘정신적 진보’를 위한 기회가 찾아왔다. 남편이 일본 외무성이 변방에서 일한 관리에게 주는 해외 위로여행 대상자가 된 것. 남편은 독일 베를린에서 법률을, 정월은 프랑스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야수파와 인상파의 영향으로 그림에 감성이 표출됐다. 최린(崔麟)과 사랑에 빠지면서 감성이 폭발했다. 사랑과 함께 정월의 예술도 보름달처럼 차올랐다.

남편은 귀국 후 변호사 개업을 했지만 경제사정이 어려웠다. 정월이 최린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청하는 편지가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남편은 이혼을 요구했고, 최린은 정월을 외면했다.

이제 세간의 관심은 정월의 예술이 아니라 ‘불륜’에 모아졌다. 1932년 한 미술전에서 정월의 그림은 “쇠락을 고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그는 떠돌이 생활을 하다 1948년 겨울 객사했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사회에서 매장된 뒤 쓸쓸히 숨졌지만 그의 삶이 불행했던 것만은 아닌 듯하다. 정월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예술과 자아, 감성이 하나가 되는 ‘삶의 본질’을 누렸으니까.

김승진 기자 sarafi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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