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의 현장체험]외국인과 '하루 데이트'

  • 입력 2003년 12월 25일 17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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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녀와의 데이트는 즐거움 그 자체였다. 서울 대학로에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포즈를 취한 원 데이 커플(사진 위), 아래 왼쪽은 인사동의 전통공예품 판매점. 그녀는 실제로 몸매 관리를 위해 식사시간에도 레몬 쥬스만 마셨다.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녀와의 데이트는 즐거움 그 자체였다. 서울 대학로에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포즈를 취한 원 데이 커플(사진 위), 아래 왼쪽은 인사동의 전통공예품 판매점. 그녀는 실제로 몸매 관리를 위해 식사시간에도 레몬 쥬스만 마셨다.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친구들을 만난다.

정치 경제 사회…. 대화는 제법 심각하게 시작되지만 언제나 뻔한 여자 이야기(여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로 끝난다.

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한 명은 반드시 ‘안주’가 된다는 것. 아직도 결혼을 못한, 여자친구도 없는 사람이 대상이 되기 쉽다.

주요 레퍼토리는 원하는 여성상을 말하면 “눈만 높아가지고…”, 키 큰 여자가 좋다고 하면 “네 키를 생각해…”, 묻지도 않았는데 “내 (여자)친구들은 다 (애인이) 있어”란 말.

견디다 못해 반항을 해본다. “정 안되면 외국에서 찾지 뭐.”

“미치지 않았냐.”

34년간, 그렇게 살아왔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너희들은?’

진실로 얼굴은 부질없는 꽃잎이고, 몸매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리는 장애물이며, 미모를 밝히는 것은 생각 없음의 전형이란 말인가.

오늘, 사람들의 충고가 얼마나 진실한 것이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 올가

방년 19세. 벨로루시 출생의 8등신 금발 미녀. 키 178cm. 장래 희망은 모델. 현재 에버랜드 공연팀 소속.

취재를 위해 ‘위장 커플’이 됐다. 우리끼리는 ‘One day couple’이라고 불렀다.

그녀와 함께 후배, 친구들을 만나고 서울 강남역 골목을 거닐었다.

○ 대박 났네!

첫 만남은 고교 동창들. 오래간만에 밥이나 먹자고 토요일 점심 때 친구들을 불렀다.

“내 여자친구야.”

갑자기 등장한 그녀로 인해 어리둥절해하던 친구들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네가 역시!”하며 나를 끌어안았다.

“네가 드디어 대박을 터뜨렸구나.”

“자식, 내 그럴 줄 알았다. 넌 원래 후반전에 강했어.”

“인생역전이 바로 너였구나.”

수많은 걱정과 충고는 다 어디로 갔나. 곧이어 그녀에게로 이어지는 질문들.

다들 영어가 짧아 깊은 질문은 못하고 “국적이 어디냐”, “언제 만났냐”는 정도. 그리고 또 하나 “유 아 베리, 베리 뷰티풀”이다.

한국어를 모르는 그녀가 대부분의 질문에 빙그레 웃기만 하자 친구들은 “엄청 착하네∼”라며 나보다 더 좋아했다.

저녁 식사 주문 때의 대화.

(친구들) “What do you want to eat?”

(그녀) “Only juice, salad or yogurt.”

(친구들) “Why?"

(그녀) “Diet.”

(친구들) “Oh∼.”

“몸매를 관리해야 한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친구들은 서로 자기가 ‘쏠’ 테니 한 잔 더 마시라고 앞 다퉈 권한다. 2시간여 후 일어나자 한 친구가 주차장까지 배웅을 해주며 말했다.

“야, 친구들은 없냐?”

○ 형! 보고 싶었어요

다음 자리는 가장 친한 한 후배와의 만남.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보던 사이지만 최근 두 달여 동안은 녀석의 이런 저런 핑계로 전혀 못 만났다.

놈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한국 남자. 딸이 유학이나 하숙을 하겠다고 하면 차라리 머리를 밀어버리겠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며 지역 차별도 상당한 수준이다. 당연히 사귀는 여자에 대해서도 집안과 교육, 출신 등의 기준이 높다.

그녀가 화장실에 간 사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타난 후배는 그녀가 돌아오자마자 표정이 변했다. 어색한 모습으로 인사를 마친 후의 첫 마디.

“형! 보고 싶었어요.”

그녀가 한국어를 모르니 편하게 이런저런 고민 상담을 했다.

(나) “외국인인데 괜찮을까.”

(후배) “형 촌스럽게 왜 그래.”

(나) “대학도 아직 안들어 갔고….”

(후배) “대학 나와도 노는 애들이 더 많아.”

(나) “나보다 키도 훨씬 크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데….”

(후배) “고맙지.”

교회 수련회를 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 없다던 후배는 “나중에 가도 된다”며 보드 카페를 가자고 했다. 그곳에서 3시간여를 함께 놀았다.

○ 꽃 파는 할머니

평소 충고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그녀와의 만남은 비판과 성토의 대상이 됐어야 했다. 우리식으로 따지면 속된 말로 학벌은 고졸, 중산층도 안돼는 집안, 허영이 가득 찬 모델 지망생…. 짧은 영어로는 사람이 참한지 아닌지, 내면이 꽉 찼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들이나 나나 오로지 보이는 것은 외모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너 정말 재미있게 사는구나”라는 찬사가 전부.

친구에게 넌지시 말해봤다. “차라리 필리핀이나 태국 쪽으로 알아볼까”라고.

친구의 즉답, “야! 무슨, 집에 가정부 둘 일 있냐.”

‘얼굴보다 마음이 최고야’란 말은 배달민족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었나. 상대가 백인 미녀면 마음씨도, 집안도 상관이 없나보다.

거리와 카페에서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대부분 ‘저 놈 재벌 2세인가봐’ 하는 듯한 표정들. 일부는 러시아 여성을 유흥업소에 소개시켜주는 사람으로 보는 것도 같았다.

강남역 일대를 몇 바퀴 도는데 갑자기 꽃 파는 할머니가 끼어들었다.

“샥시 이쁘네∼.하나 사줘.”

“색시 아니에요.”

“뭘 아녀. 다 알아. 너 돈 많지?”

원래 취재 계획은 그녀를 집에까지 데려가 부모님께도 소개하는 것이었지만 차마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님이 쓰러지실 것 같아서…. 친구들의 편견은 욕을 했지만 나 스스로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고작 하루 동안의 연기였지만 나름대로 정은 들었다. 그녀에게 어떤 (남자)스타일을 좋아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feeling”이라며 “돈, 외모 같은 것은 별로 안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난기가 돌아서 슬쩍 다시 물었다. “그럼 나는 어떠냐”고.

“푸하하∼.”

편견은 한국인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 거울속의 나

집에 와서 낮에 만난 친구와 다시 통화를 했다. 내가 없을 때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애들이 뭐라고 해.”

“부러워 죽으려고 하지. 네가 진짜 인생을 산다며….”

“언젠 정신 못 차리고 산다고 핀잔하더니. 외모나 나이는 별로 안 중요하다며?”

“너도 알잖아. 괜히 좀 못한 놈 씹으면서 재미있어 하는 것. 그러면서 자기들은 안 그런 척 하기도 하고.”

“나에 대해서 뭘 제일 걱정해줘.”

“러시아 여자들은 나이 들면 확 뚱뚱해지지 않느냐고. 반은 그때 되면 곤란할 거라고 하고 반은 아직도 10년은 더 지나야 할 문제라고 하고…. 결론은 음식 조절만 잘 시키면 별 문제없을 거라고 하더라.”

“어제까지는 생각 없는 놈이었는데, 왜 하루 만에 달라질까.”

“그러니까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하잖아. 아무튼 축하한다. 너도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구나.”

“난 달라진 것이 없는데.”

“자식, 겸손하긴. 우리 중에 네가 제일 성공한 것 같다.”

전화를 끊고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모습. 하룻밤 사이에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니고 갑자기 ‘킹카’가 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세간의 평가는 하늘과 땅을 오갔다. 어느 것이 진짜 ‘나’일까.

장자의 나비 꿈이 어찌 장자만의 경험일까 보냐. 진짜 진심 어린 충고를 하는 친구가 있었다면 뭐라고 말을 했을까.

취재할 수 없는 것의 궁금증이 밀려왔다.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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