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가혹행위 방지보다 軍기강 우선”

  • 입력 2003년 10월 6일 18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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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간부와 선임병의 질책과 폭언, 폭행 등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자살한 사병에 대해 법원이 최근 “국가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잇달아 내리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법원은 이들 판결에서 군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내 가혹행위 방지보다 군 복무기강 확립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판결 이유를 들었다.

법원의 이 같은 판결은 국방부가 8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사고예방 종합대책’이 말썽의 소지를 사전에 차단하는 데만 주안점을 두어 군 기강 해이 문제를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백춘기·白春基 부장판사)는 6일 부대 내 간부와 선임병의 폭언과 폭행, 수면 부족으로 인한 피로 등을 견디지 못하고 2002년 자살한 정모씨(당시 이등병·21세)의 아버지가 서울지방보훈청장을 상대로 낸 국가유공자 비대상 결정 처분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군 조직 유지를 위해 어느 정도의 군기교육이나 질책은 필요불가결하고 폭행이나 폭언이 있더라도 지속적이거나 정도가 심한 경우가 아니라면 군인으로서 이를 극복하고, 상부에 시정을 요구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정씨가 당한 폭행, 폭언에 위법성이 있고 소속 부대가 신병관리를 잘못한 점이 있기는 하나 정씨를 자살에 이르게 할 정도의 것은 아니다”며 “정씨의 자살은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 부족과 판단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앞서 창원지법 제1행정부(박성철·朴性哲 부장판사)도 2일 군복무 중 모욕과 구타 때문에 2002년 자살한 윤모씨(당시 이등병·20세)의 아버지가 낸 같은 취지의 소송을 기각했으며 부산지법 행정부(고종주·高宗柱 부장판사)도 군 입대 직후 선임병의 욕설과 인격모독에 시달리다 같은해 자살한 강모씨(당시 이등병·21세)의 아버지가 낸 소송을 지난달 기각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군 내부에서는 재판부가 군 복무기강의 중요성을 판단한 결과라며 긍정적인 반응이 많은 편이다.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병과 유가족에 대해서는 안타깝지만 영내 생활을 못 견뎌 자살한 병사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에는 누구도 동의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국방부가 8월 마련한 사고예방 종합대책에 따르면 군대 내에서 후임병에게 비속어 등 언어폭력을 행사하거나 얼차려(기합)를 주고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다 적발되면 형사 입건돼 1∼5년의 징역형을 받거나 징계처분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책 발표 후 군 내부에서는 “군 기강이 해이해져 통솔에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한편 정씨의 변호인인 원창연(元昶淵) 변호사는 “자살한 정씨가 기본권을 명백히 침해당한 데다 최근 군대 내에서 사병에 대한 가혹행위를 엄중 처벌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는데도 이 같은 판결이 난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항소의 뜻을 밝혔다.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

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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