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스핀 닥터

  • 입력 2003년 7월 28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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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부총리’로 불려온 영국의 앨라스테어 캠벨 총리공보수석이 조만간 물러날 모양이다. 열흘 전 자살한 데이비드 켈리 박사가 ‘정보보고서에 이라크가 45분 안에 대량살상무기를 실전배치할 수 있음을 삽입하라고 지시한 인물’로 지목했다는 바로 그 사람이다. 당시 캠벨 수석은 펄쩍 뛰었다. 그러나 켈리 박사의 녹음테이프를 갖고 있는 BBC는 그의 개입을 틀림없는 사실로 본다. 본격적 진상규명 절차가 남아있으나 보고서 제출 직전 캠벨 수석이 회의를 소집했으며 미묘한 방법으로 문구 등을 바꿨음을 의회에서 알아냈다고 더 타임스는 전하고 있다.

▷9년간 토니 블레어 총리의 입노릇을 하며 ‘오늘의 총리를 만든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던 캠벨 수석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스핀 닥터(Spin Doctor)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뉴스를 왜곡 조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스핀이란 원래 야구 투수가 던지는 커브볼에서 나왔지만 요즘 같은 정치적 함의는 1984년 뉴욕 타임스 사설에서 비롯됐다. 미국 대통령후보 TV 토론이 끝나자 기자실에 스핀 닥터들이 몰려들어 자기편에 유리하게끔 홍보기술을 발휘했다는 내용이다. 이들 스핀 닥터는 최근 들어 정치인보다 더 시선을 모은다. 헨리 키신저의 말대로 정치가 위대한 최음제라면 정치를 현란한 말로 덧씌워 자기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이 바로 스핀 닥터이기 때문이다.

▷캠벨 수석의 공보 철학은 “국민에게 정부 메시지를 확신시키기 위해선 강력한 주먹이 필요하다”였다. 타블로이드신문 기자 출신이자 한때 야한 소설을 쓰던 전력을 바탕으로 본질보다 포장, 진실보다 이미지에 신경을 썼다. 조작 공격성, 그리고 창의력을 무기삼아 언론을 조이고 을러서 ‘충격과 공포의 정치’를 진두지휘했다는 평도 나온다. 만일 그의 뉴스 조작으로 영국이 이라크전쟁에 끼어들었고 블레어 총리의 정치적 생명이 위태로워진다면? “스핀으로 일어선 정권은 스핀으로 망한다”는, 블레어 총리의 정적이었던 윌리엄 헤이그 전 보수당 당수의 극언은 무서운 예언이 되는 셈이다.

▷총리실은 캠벨 수석의 사임을 공식적으로는 부인한다. 사임을 발표했다가는 그의 잘못이 공식화되므로 ‘자연스럽게’ 물러나게 할 것으로 영국 언론은 내다보고 있다.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진실을 농락해온 스핀 닥터 한 사람이 사라지는 건 반가운 일이다. 단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캠벨 수석을 날뛰게 만든 진짜 원인은 어디서 비롯됐느냐는 점이다. 권력자를 제쳐놓고 권력의 입만을 비난하는 것 또한 달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나무라는 꼴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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