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전쟁]<上>강한 미국 ‘弱달러’ 밀어붙이기

  • 입력 2003년 7월 21일 1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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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 제조업, 농업, 임업분야의 82개 산업협회가 결성한 ‘건전한 달러를 위한 연합(CSD)’이란 단체가 있다. CSD는 요즘 “중국 일본 한국 대만 등 아시아 4개국이 자국 통화의 강세를 막기 위해 외환시장에 수시로 개입하면서 환율조작을 일삼고 있다”며 미국 정부의 적극적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은 수출중심의 고도성장을 위해 지난 1년6개월 동안 달러화에 위안화의 가치를 고정시키고 있고 앞으로도 이 같은 정책을 지속할 방침임을 밝히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외환당국도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사들여 원, 엔화 가치가 지나치게 오르지 않도록 방어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연일 아시아 각국의 이런 방어행위에 대해 거칠게 경고하고 있고 아시아 통화가치 상승을 예상한 환투기세력까지 가세하고 나섰다. ‘환율전쟁’의 조짐이 보이는 데다 아시아 각국의 방어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수출이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차지하는 ‘대외의존경제’인 한국은 원화가치가 상승하면 수출부진과 경기회복 지연을 겪는다.

▽미국의 무역적자와 달러화 약세 정책=95년부터 진행된 달러화 약세에도 불구하고 미국 무역수지는 계속 나빠지고 있다. 미국의 올 1∼4월 무역적자는 작년 같은 기간의 1454억5000만달러에서 1826억1000만달러로 확대됐다.

국제금융센터는 미국 무역적자 확대의 원인으로 △미국의 소비주도형 경기회복 △주요 수출시장인 유로지역과 일본, 중남미지역의 경기침체 △원유가 상승에 따른 수입부담 증가 등을 지적했다.

한국은행 변재영(卞在英) 외환운영팀장은 “미국은 감세정책과 초저금리정책 등 경기회복을 위한 수단을 모두 쓴 상황에서 달러화 가치하락(약세) 정책을 통한 수출확대만 남아있다”며 “미국이 노리는 수출시장은 중국과 일본, 한국”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일본 한국 대만이 주범?=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아시아 4개국에 대한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는 연간 2000억달러를 넘으며 전체 적자의 43%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 CSD는 중국이 달러화에 대한 위안화 환율을 유지하기 위해 지난 12개월 동안 880억달러를 매입했고 일본도 올 5월에만 428억달러를 사들였다고 주장했다.

한국은행 이상헌(李相憲) 부총재보는 “미국은 중국에서 연간 1000억달러, 일본에서 700억달러의 경상수지 적자를 내고 있으며 이를 환율로 조정하려 한다”며 “이에 따라 미국은 중국과 일본의 환율에 대해 시비를 걸고 있고 특히 중국에 대해선 현재의 고정방식인 페그(peg)형 환율 제도를 바꾸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존 스노 미국 재무장관이 중국에 대해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을 노골적으로 요구한 가운데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도 17일 “중국 위안화가 실제보다 저평가돼 있으며 아시아 국가들도 환율정책을 더 신축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며 각국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을 견제했다.

▽경기회복을 위협하는 원화가치 상승=원-달러 환율은 2001년의 달러당 1290.83원에서 2002년 1251.24원, 2003년 1·4분기 1201.11원 등으로 내림세를 보이고 있다. 원화가치가 오름세를 보인 결과다. 7월 들어 원-달러환율은 달러당 1170∼1180원선을 유지해 원화가 강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형수(李亨秀) 외환은행 시장영업본부장은 “중앙은행의 개입이 없었으면 원-달러 환율은 1150원까지 갔을 것”이라며 “앞으로 당국의 개입이 없다면 달러당 1100원까지 내려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하반기에 원-달러 평균 환율이 달러당 1150원, 금융연구원은 1160원선으로 예측하고 있다. JP모건은 연말에 달러당 1100원선까지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 따라 국내 수출업계엔 비상이 걸렸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수출업계의 적정 환율은 평균 1229원으로 나타났다. 손익분기 환율은 1190원에서 1210원이라는 기업이 조사대상의 23.2%, 1210원이라는 응답이 9.1%로 나타나 이미 수출기업의 3분의 1이 채산성 적자에 직면했다.

외환당국은 수출을 위협하는 원화가치 상승을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미국의 압력과 환투기세력의 공세를 얼마만큼 막아낼지는 미지수다.


임규진기자 mhjh22@donga.com

▼역대 세계 환율전쟁▼

‘환율전쟁’은 시작되는가. 미국이 중국 일본 한국 대만 등 4개국을 겨냥해 거센 환율 공세를 펴고 있다. 날이 갈수록 방어는 힘들어 보이고 수출기업의 대외경쟁력과 무역수지 적자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환율 인상(자국 통화가치의 인위적 인하)은 1970년대 이후 교역경쟁에서 강력한 무기로 활용돼 왔다. 기술 혁신이나 생산성 향상 없이도 무역수지 흑자를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1973년 미국의 금 태환 정지 선언을 계기로 국제적인 고정환율제도가 무너진 이후 ‘환율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 사례가 1985년 9월의 플라자 합의. 미국 독일 일본 등 당시 선진 5개국은 ‘달러화 약세-엔화 및 마르크화 강세’로 가자고 합의했다. 독일과 일본은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를 올리고 있었던 반면 미국은 ‘쌍둥이 적자’(무역수지 및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달러벌이를 하면서 미국 경제 붕괴에 따른 국제 경제질서의 혼란을 방관하느냐, 아니면 ‘울며 겨자 먹기’로 자국 통화가치 인상 요구를 받아들일 것이냐의 기로에서 독일과 일본은 후자를 선택했다.

85년 9월 236엔 하던 엔-달러환율은 88년 5월 124엔으로 떨어졌다. 그 결과 일본과 독일 경제는 극심한 불황에 빠지는 후유증을 앓았다. 기업들은 해외로 공장을 옮겼다.

일본은 금리인하로 경기부양을 꾀했다. 결과는 미지근한 경기회복 속의 부동산경기 과열이었다. 부동산 거품을 가라앉히기 위해 잇따른 금리인상 요법이 동원됐다. 하지만 90년대 초의 거품붕괴는 뜻하지 않게 10년 이상의 장기불황을 낳았다.

다음은 미국이 양보할 차례였다. 독일 및 일본 경제의 몰락을 막기 위해 미국은 95년 ‘달러 강세-엔화 및 마르크화 강세’를 골자로 한 ‘역(逆)플라자 합의’를 주도했다. 효과는 일본과 독일의 경기회복보다는 미국으로의 대량 자본유입과 미 주식시장의 거품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존 스노 미 재무장관의 ‘달러화 약세 용인’ 발언으로 촉발된 이번 ‘환율전쟁’은 강대국들간 환율조정의 새로운 양상. 피데스투자자문 김한진(金漢進) 상무는 “이번 전쟁은 플라자 합의나 역플라자 합의보다 세계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더 많이 줄 것”으로 전망했다.

85∼87년에 극적인 달러화 약세에도 불구하고 미국 수출은 7% 증가하는 데 그쳤으며 수입물가 상승으로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환율 조정 하나만으로 주요 경쟁국들과의 경쟁력 격차를 좁히려고 한 탓이었다.

이번에는 여건이 다르다. 미국은 경제 펀더멘털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 ‘미국 경제 회복→다른 나라들의 경제 회복→미국 경제 호전’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기대되는 상황이라는 진단이다.

이철용기자 lc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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