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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달러서 주저앉나]<4>하향 평준화의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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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달러서 주저앉나]<4>하향 평준화의 덫

입력 2003-07-03 18:46수정 2009-10-10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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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A초등학교는 올해 초 특기적성교육의 하나로 시험을 통해 우수 학생을 골라 ‘수학 영재(英才)반’을 만들었다. 그러자 “공부 잘하는 학생만 모아 가르치는 저의가 뭐냐”, “우리 애는 왜 빠졌느냐”는 학부모들의 항의 전화가 줄을 이었다. 이 학교의 한 교사는 “대다수 학부모들이 평등주의에 사로잡혀 ‘영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데 영재교육이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국내에서 미국 간호사 자격시험 준비를 위한 온라인 강좌를 하는 ‘지원USA’에는 약 200명이 회원으로 등록해 있다. 회원의 절반은 기혼 여성. 오래 전 간호사를 그만둔 40대 주부도 적지 않다. 이들이 뒤늦게 시험공부에 매달리는 것은 생활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자녀들의 조기유학을 위해서다. 미국 병원에 취업하면 영주권을 받아 현지에서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녀들을 미국 학교에 보낼 수 있다는 것.

▼연재물 목록▼

- <3>'2030'세대 과소비 거품
- <2>노조 강경투쟁의 그늘
- <1>'내몫 챙기기' 집단신드롬

▽해외로, 해외로=작년 한 해 동안 해외로 유학이나 연수를 떠난 한국인은 모두 34만3842명. 이들이 해외에 뿌린 외화는 45억8000만달러(약 5조5000억원)에 이른다고 한국무역협회는 추산한다. 이는 지난해 무역흑자액의 42.4%, 교육인적자원부 예산의 4분의 1이나 된다.

의료분야에서도 국내 서비스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 소비자들이 해외로 나가려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LG화재는 1월 국내에서 암 진단을 받았을 때 해외 유명 의료기관에서 2차 소견을 들을 수 있는 보험 상품을 내놨다. 판매 초기인데도 이 상품에는 월평균 1만여명씩 모두 6만여명이 가입, 보험사 기대치의 2배 가까이 웃돌았다.

한국갤럽이 2000년 6월 서울 강남지역 40평 이상 주택 거주자 27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8%는 “해외 치료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28.8%는 “외국 병원에 가고 싶었지만 사정이 있어서 못 갔다”고 응답했다. 68.5%는 “병이 나면 외국 병원에서 진료를 받겠다”고 답했다.

획일적인 건강보험 수가 때문에 수련의들이 위험하고 힘든 외과를 기피하면서 “머지않아 맹장수술을 받으러 해외에 나가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꽉 막힌’ 평준화의 함정=박병원(朴炳元) 재정경제부 경제정책국장은 “획일적인 평준화논리가 지배하는 한 교육과 의료분야에서 서비스 고급화가 이뤄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면서 “관련 산업의 국제경쟁력이 떨어지고 구매력을 가진 사람이 해외로 나가는 현상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지적했다.

이건희(李健熙) 삼성그룹 회장은 최근 본보와의 서면인터뷰에서 “21세기는 천재 한 명이 10만명, 20만명을 먹여 살리고 창조적 인재가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한다”며 “천재를 조기 발굴해 육성하는 것이 시급한데도 위화감 때문에 시도 한 번 못해본다. 하향평준화를 방치하면 국가의 장래가 어둡다”고 안타까워했다.

곽병선(郭柄善) 전 한국교육개발원 원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가에서 한국 학생의 평균성적은 상위권인데도 상위 5%만 떼놓고 보면 순위가 크게 떨어졌다”면서 “평준화가 기여한 점도 많지만 국제경쟁력을 가진 소수 인재를 키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진단했다.

의료분야에서도 하향평준화는 서비스 개선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건강관리전문회사인 코어메드의 이미숙(李美淑) 부사장은 “의료서비스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현행 건강보험제도에서는 병원들이 싼 약품을 쓰거나 과잉진료를 하는 것이 수익성을 높이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며 “의료서비스 서비스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숨통을 터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적당히 나눠먹기와 뒷다리 잡기=기업이나 공직사회에서도 한국 사회 특유의 평등의식 때문에 능력에 따른 인사나 보상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올해 초 승진한 모 건설회사의 B과장은 지난해 팀 고과(考課)에서 1위를 했다. 과장 승진 연한이 됐다는 이유로 동료들이 고과점수를 몰아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불평을 털어놓지 않았다. B과장 또한 재작년까지 승진을 해야 하는 선후배들을 위해 고과를 희생했기 때문이다. 공무원 성과급제도도 성과와 무관한 나눠먹기로 운영되는 사례가 많다.

노골적인 뒷다리 잡기도 여전하다. 최근 재건축사업에서는 시공사가 이미 정해졌는데도 탈락한 건설사들이 일부 주민들에게 뒷돈을 대주면서 사업 추진에 발목을 잡는 사례가 적지 않다.

안재환(安在煥) 딜로이트컨설팅 전무는 “적당한 나눠먹기나 뒷다리 잡기식 하향평준화는 조직 전체나 국가를 위해서는 물론 장기적으로는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공정한 규칙에 따라 경쟁을 하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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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근로자 능력따라 급여差 3배 자본주의▼

중국 상하이(上海)의 ㈜효성 스판덱스 공장 근로자는 기본 월급으로 1400위안(약 22만4000원)을 받는다. 하지만 같은 경력이라도 각종 인센티브 덕분에 5000위안을 넘게 받는 직원도 있다. 또래 직원끼리 급여 차가 3배를 넘어도 불만은 없다.

이 회사 중국법인 영업팀장인 서형석(徐泂錫) 이사는 본보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사회주의 중국인들이 자본주의자인 저에게 오히려 자본주의를 알려 주고 있다”며 “열심히 일한 대가로 누가 얼마나 많이 받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전했다.

사회주의 ‘철 밥통’의 신화가 깨진 지 불과 10여년. 중국은 이렇게 달라졌다. 성과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LG화학 중국지사에 근무하다 최근 귀국한 강교신(姜敎信) EP사업부 해외영업팀장은 처음에는 취재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사례에서 ‘한국병(病)’을 극복할 교훈을 얻으려 한다는 말에 자신의 체험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가 1997년 거래처인 중국 칭다오(靑島) 하이얼사(社) 공장을 방문했을 때의 경험. 맥 빠진 여느 중국 공장과는 달랐다. 강 팀장은 그 차이를 공장 벽에 적힌 직원별 불량률·생산성 수치에서 발견했다. 그는 “근로자 월급이 실적에 따라 2, 3배 차이가 나는 데 놀랐다”고 말했다. 심지어 같이 진급한 임원끼리도 보수 차가 2배에 달했다.

한국타이어는 2000년 중국에 진출해 장쑤(江蘇)공장을 개편했다. 핵심은 철저한 성과급제.

모든 근로자를 1년 단위 계약제로 고용했다. 실적에 따라 근로자 월급을 700∼2000위안까지 차별화했다.

조승래(趙勝來) 한국타이어 중국지사 전략기획팀장은 “불량률은 3%에서 1% 이하로 떨어졌고 급여 차이에 대해 항의하는 직원은 없었다”고 말했다.

강 팀장은 “중국에서는 누가 벤츠를 타거나 고급호텔에서 밥을 먹든지, 남의 부(富)에 질투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 이사의 친구인 중국 저장(浙江)성 화펑(華峯) 스판덱스의 양충덩(楊從登) 사장은 일반 직원 연봉의 100배인 100만위안(1억6000만원)을 받는다.

지난해 월드컵이 끝난 뒤 서 이사는 중국 친구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만약 중국이 월드컵 4강에 진출했다면 선수마다 몇 분 뛰었는지까지 따져 포상금을 분배했을 텐데 어떻게 한국에서는 90분을 뛴 선수와 후보 선수의 포상금이 같을 수가 있는가?”

이시형(李時炯) 사회정신건강연구소장은 “자본주의 실험을 막 시작한 중국인조차 시장과 경쟁원리를 받아들이는 현실을 우리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A사의 한국 및 중국 법인 급여 체계 비교
한국구분중국
3400만원최저 연봉1만6800위안
3400만원최고 연봉5만8000∼6만 위안(매년 실적에 따라 변화)
없음최고, 최저 연봉 차이 최고 연봉은 최저 연봉의 3.6배
공평 원칙연봉 근거 실적에 따른 차별화
실적 평가 어렵고, 회사의악용 우려. 노조 반대인센티브 차별화에 대한 근로자 인식능력 따른 차별화 당연,남과 비교할 필요 없음
10배CEO연봉과 30대 생산직의 연봉 차이100배
최고, 최저연봉은 30대 초반 생산직 근로자 기준,
한국 법인 사무직 근로자는 성과급 차별제도 운영. 대졸 입사 5년차 기준으로 최고 연봉은 최저 연봉의 1.11배. 생산직은 성과급 차별 없음.

▼집단평준화론 2류국 못벗어난다▼

생산에 들어가는 노동과 자본을 늘리는 양적인 방법으로 국민소득을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경제발전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성장 모델과 국민의식을 바꿔야 한다. 선진국 등의 사례를 볼 때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가 대체로 그 시점이다.

더구나 한국은 ‘세계의 공장’이라는 중국과 이웃하고 있다. 값싸게 많이 만드는 방법으로는 중국과 경쟁할 수 없다.

한국 경제가 중국과 격차를 벌리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품을 고급화하고 산업을 고부가가치화해야 한다.

평준화와 집단주의가 과거 한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한다.

교육평준화는 값싼 양질의 노동력을 제조업체에 풍부하게 공급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인들은 “못살아도 같이 못살고 잘살아도 같이 잘살자”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열심히 일해 왔다. 절대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이보다 좋은 구호는 없다.

그러나 한국이 이류에서 일류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집단 평준화 의식’을 빨리 버려야 한다.

고급화란 차별화다. 개인의 창의성과 다양성이 핵심이다. 능력에 맞는 보상도 뒤따라야 한다.

튀는 개인과 소수를 인정하고 키우지 않으면 그 사회 전체의 성장 동력이 사라진다. 피해가 당사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에게 미친다.

소비분야에서도 ‘사치’가 아닌 ‘고급소비’를 비난하지 않아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여성 신발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게 된 데는 어느 나라보다 눈이 까다로운 고급소비자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국내에서 벤츠나 BMW 같은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나쁘게 볼 필요도 없다. 고급제품을 써보면 소비자의 눈이 높아지고 국내 기업의 고급화에도 자극이 될 것이다.

문휘창 서울대 국제지역원 교수

▼특별취재팀▼

▽권순활 경제부 차장(팀장)

천광암 이은우 김광현

정미경 신치영 이헌진

홍석민 고기정 기자(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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