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2인자]1인자와 역할분담 앨 고어-저우언라이

  • 입력 2003년 7월 3일 16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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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 고어. 동아일보 자료사진
앨 고어. 동아일보 자료사진
미국의 워싱턴 정가에는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가 전해 내려온다.

“두 형제가 있었다. 한 명은 바다로 가고 나머지 한 명은 부통령이 됐다. 그 후 두 사람의 소식은 영영 들을 수 없었다.”

미국 초대 부통령인 존 애덤스는 “부통령이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가장 무의미한 직책”이라고 신세 한탄을 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시절 부통령으로서의 리처드 닉슨의 업적에 대한 질문을 받자 “글쎄, 나에게 일주일 더 시간을 준다면 한 가지쯤 생각해낼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미국 정가의 2인자는 이렇듯 조소의 대상이 되는 무기력한 자리였다. 그러나 클린턴 전 대통령을 보좌했던 앨 고어 전 부통령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힘 있는 2인자로 평가받는다. 2인자로서 그의 파워는 1인자와 통치권을 ‘공유’했던 데서 나왔다.

●대통령직을 공유한 고어

고어는 하버드 출신으로 좋은 교육을 받고 어려서부터 상원의원인 아버지가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과 전화 통화하는 내용을 듣고 자라며 정치적 감각을 익힌 ‘준비된 부통령’이었다.

그러나 권력 없는 특혜를 누리는 2인자의 설움을 너무도 잘 알았던 고어는 부통령 지명 수락 연설 전 부통령직에 관한 몇 가지 원칙을 정했고 클린턴도 이 같은 원칙에 동의했다.

우선 고어는 자신의 역할을 클린턴의 ‘실질적인 파트너(managing partner)’라고 정의했다. 대통령 집무실 가까이 자신의 집무실을 두었고 클린턴과 매주 1회 배석자 없이 오찬 모임을 가졌다. 고어의 참모들은 클린턴의 참모들과 유대를 가졌으며 특정 분야는 고어가 사실상 대통령의 역할을 대리했다. 고어가 8년간의 재임 기간에 클린턴을 대신해 대통령 역할을 수행한 분야는 환경, 과학, 첨단기술,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우주탐사, 정부조직 개편, 담배산업, 전 소비에트 연방의 핵무기 문제 등이다.

고어와 클린턴은 여러 모로 대조를 이루었다. 클린턴은 직관에 의존하는 데 비해 고어는 철저히 귀납적인 방식으로 정보를 해석하고 결정을 내렸다. ‘백악관의 유일한 어른’ 고어는 ‘질서가 없고 자기 정당화에 능한 미숙아’ 클린턴과 조화를 이루며 멋진 팀플레이를 보여주었다.

●마오쩌둥의 분신 저우언라이

저우언라이.

중국의 초대 총리이자 외무부 장관을 지낸 저우언라이(周恩來)도 1인자인 마오쩌둥(毛澤東)과 역할을 분담했다. 마오쩌둥이 혁명기 중국의 사상적 골격을 세운 카리스마 넘치는 아버지라면 저우언라이는 실질적인 문제를 챙기며 격변기를 이겨낸 온화한 어머니였다.

중상층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과 프랑스에서 공부한 저우언라이는 중국 공산당 내에서 엘리트 그룹을 이끄는 선두주자였다. 그러나 중국 혁명의 주체는 도시 빈민층이 아니라 농민이라는 사실, 그리고 마오쩌둥만이 농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뒤 스스로를 낮춰 그가 당권을 잡도록 도왔다.

저우언라이는 1949년 중국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초대 총리로 발탁됐다. 안으로는 신 중국의 뼈대를 세우고 공업 농업 국방 과학기술의 현대화를 실현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훗날 덩샤오핑(鄧小平)이 추진하는 개혁 개방 정책의 초석을 깔았다. 밖으로는 1972년 닉슨과 마오쩌둥의 회담을 성사시키는 등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미국의 언론인 에드거 스노는 저서 ‘중국의 붉은 별’에서 ‘공생이라는 단어가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한 말일 것이다’고 썼다.

닉슨은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중국의 혁명은 결코 불붙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그 불길은 다 타서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고 했다.

저우언라이는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그는 문화혁명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홍위병의 권력이 커지고 있는 것에도 싫은 내색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우언라이와 같은 거물이 변덕스럽고 때로 포악하기까지 했던 마오쩌둥과 40여년을 함께 한 비결은 무엇일까.

●2인자의 처세술

저우언라이는 겸손하고 당내에서 개인적 계파도 만들지 않아 마오쩌둥에게 신뢰를 주었다. 그는 ‘허우타이(後臺·무대 뒤에 있는 사람)’를 자처해 늘 마오쩌둥보다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 그의 정적들은 마오쩌둥이 반동으로 간주하는 공자에 빗대어 저우언라이를 공격하기도 했다. “공자가 노나라 군주에게 그러했듯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에게 전전긍긍 공손하게 군다”는 것.

능력 있는 2인자에게 1인자가 되고 싶은 꿈은 없었을까. 저우언라이는 ‘성공’과 ‘명성’을 구분했다. 미국의 특사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했던 헨리 키신저가 마오쩌둥에게 권력을 이양한 이유를 묻자 저우언라이는 이렇게 답했다.

“조타수(저우언라이)는 조류(마오쩌둥)를 이용해 배(중국 혁명)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고어도 주목받는 것을 피했다. 카메라에 잡히지 않도록 언제나 대통령의 한 걸음 뒤에 섰다. 개인적 야망에도 불구하고 충성심 있고 자기 과시를 하지 않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혔다. 고어는 “부통령의 권한은 전적으로 대통령의 위임에서 나온다. 따라서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한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당시 리처드 라일리 교육부 장관은 이렇게 평가했다.

“고어는 강한 지도자의 모든 자질을 가지고 있지만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그들(고어와 클린턴)이 서로 잘 지내는 이유다.”

그러나 고어의 대선을 기획한 참모들은 바로 이 점을 걱정했다. 고어가 자신의 파워를 최대한 이용하는 대신 대통령의 마음에만 들기 위해 애쓴다는 것. 참모들은 고어가 클린턴에게 자신이 늘 정확한 판단을 하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온갖 자질구레한 일을 챙기고 언제나 늘 클린턴 곁에 서려 한다고 비난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정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로더는 “최상의 상황에서 2인자에서 1인자로 자리를 바꾸는 것은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일이다”고 했다. 1인자에 대한 충성심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대 부통령 가운데 임기를 마친 후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람은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마틴 반 뷔렌, 조지 부시뿐이다. 고어 역시 대선에 패배해 위대한 2인자라는 기록에 만족해야 했다.

레너드 번스타인은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연주하기 힘든 악기가 제2바이올린이라고 했다. 성공한 1인자 못지 않게 성공한 2인자가 빛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고 자료:데이비드 히넌과 워런 베니스의 ‘위대한 2인자들’, 산케이신문 특별취재반 ‘모택동 비록’, 워싱턴포스트 ‘앨 고어의 삶(The Life of Al Gore)’, CNN ‘알버트 고어 주니어:상원의원의 아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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