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서병훈/ ‘共存의 지혜’ 잊었나

  • 입력 2003년 7월 1일 1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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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교수 1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유시민 옷 사건’이 화제에 올랐다. 당연히 ‘본말이 전도된 그 치기(稚氣)’에 대한 비판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생각이 달랐다. ‘발상의 전환’이라며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이것은 ‘옷 사건’ 그 자체보다도 더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소중한 발견이기도 했다. 불과 얼마 전 같으면 당연히 만장일치였을 사안이다. 그러나 이제 다른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또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정수(精髓)가 아닌가.

▼‘생각의 다름’ 윽박질러서야 ▼

그렇다면 이제 지난 대통령선거 이후 TV를 안 본다느니, 한 술 더 떠 이민을 떠나고 싶다느니 하는 말은 함부로 할 것이 못 된다. 누구 말처럼, 청와대 주인이 바뀌었더라면 분명 더 많은 사람이 더 심각하게 좌절하며 세상을 등지고 싶다고 했을 것이다. 이 엄연한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잘났든 못났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인식이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사람값이 다 똑같다면, 나하고 다른 사람의 주장과 판단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아무리 진보 쪽이라도 나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내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웃거나 윽박지른다면 무늬만 다를 뿐 ‘꼴 보수’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지금 돌아가는 모양에 대해 그렇게 세상이 무너질 듯 낙담하거나 비관할 이유가 없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잘못 열기나 한 것처럼 온갖 갈등이 한꺼번에 분출하고 폭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기왕의 ‘재래형’ 갈등에 덧붙여 세대간 갈등과 인터넷 정보 격차를 둘러싼 갈등이 한동안 풍미하더니, 이제는 그 전선이 더욱 확대되어 환경 교육 여권(女權) 문화 등 눈길 닿는 곳마다 갈등과 대립이 줄을 잇고 있다. 장단을 맞추기라도 하듯 정부마저 허둥대며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니, 반(反)‘노사모’나 태생적 비관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세상을 우리 혼자만 사는 것은 아니다. 인도에는 공용어만 15개나 된다. 종교나 카스트제도를 둘러싼 갈등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반면, 꿈의 선진국 같은 네덜란드나 스위스는 종교 언어 인종 지역 이데올로기로 사분오열돼 있다. 자칫 방심하다가는 나라가 공중 분해될 정도로 갈등의 지뢰밭이 수두룩한 것이다. 우리만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유구한 역사의 단일민족’ 자랑을 그만하고 갈등의 분출을 당연한 것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반기기까지 해야 한다.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자면 사회적 분화와 다원화는 필수적이다. 개인의 자아의식이 성장하면 참여 욕구는 높아질 수밖에 없고 그에 비례해 갈등은 커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갈등의 전선이 확대되고 있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이유가 없다.

철학자 롤스는 이런 현상에다 ‘이성적 의견 불일치’라고 이름 붙였다. 사람들 사이에 왜 갈등이 생기는가. 욕심 때문에, 무지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아무리 허심탄회하게 토론하더라도 끝내 완전한 합의에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롤스의 주장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라는 것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지혜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이 인정이 민주주의 기본 ▼

지금 사회 곳곳에서 돌출하는 과격한 언동을 보고 마음 불편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부정하거나 힘으로 억눌러서는 안 된다. 이미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할 일은 그런 숱한 차이가 마음껏 꽃필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것이다.

이 일에 관한 한 예외가 없다. 차이의 미학을 음미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평화공존의 철칙을 준수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것인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 헌신할 것인가, 그래서 법치와 다수결에 복종할 것인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 공동체에 대해 애정을 가질 것인가, 이런 물음 앞에 양심선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윽박지름이라면 얼마든지 허용돼야 한다. 이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조용히 이민을 가는 것이 좋다.

서병훈 숭실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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