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347…아메 아메 후레 후레(23)

  • 입력 2003년 6월 20일 17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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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역을 에워싸고 있는 무흘산과 만어산, 천태산을 바라다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뚝 멈춰버린 것처럼 보이네, 숲도 구름도 공기도, 뽀-하고 찢어지는 듯한 기적이 들리고, 폭 포 칙 칙 칙 칙, 천태산 터널에서 증기기관차가 모습을 나타냈다. 칙 칙 칙 칙, 낙동강을 따라 비구름 같은 연기를 뿜어내면서 기차가 홈으로 들어왔다, 칙 칙, 칙, 칙, 칙…칙…칙….

“저 뒤쪽 이등실이다. 아 아, 그렇게 안 뛰어도 돼, 1분간 정차하니까”

“제일 앞 좀 보고 올게요, 금방이요”

“거기까지 갈 시간 없어!”

“보고 싶어요, 잠깐이면 돼요!”

“종이 울리면 바로 올라타야 돼, 알았지!”

“네!”

소녀는 낯선 장소에서 길을 잃어 표지판을 기억하려는 아이처럼 달리면서 눈에 들어오는 것을 머리에 새겨 넣었다. 포신처럼 길고 검게 빛나는 기관차, 검정 바탕에 하얀 글자로 파시로 582라고 쓰여 있다, 파시로, 파시로, 파시로다! 딸랑 딸랑 발차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소녀는 휙 몸을 틀더니 치맛자락이 뒤집히는 것도 상관않고 힘껏 달렸다. 삐- 삐- 삐-! 짙은 녹색 객차가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연기 속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빨간 깃발을 손에 쥔 역원도 물건 파는 아이도 검은 연기에 싸여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서둘러 승강구까지 뛰어가 문손잡이를 잡고 계단에 발을 올려놓고 훌쩍 몸을 날렸다. 연기와 머리카락에 시야가 가리는 순간, 하얀 치마저고리가 펄럭이는 듯했는데, 눈을 두 번 깜박거리자 여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칙 칙 칙 칙, 증기음이 규칙적으로 들리고 홈이 보이지 않자 소녀는 두 손으로 문을 닫고 삼등실 문을 잡아당겼다. 열리지 않는다, 이렇게 하는 건가? 아닌데, 그럼 이렇게? 옆으로 한껏 밀자 문이 미끄러지면서 열리고, 남은 힘에 소녀의 몸이 뒤뚱 흔들렸다. 삼등실에 탄 남자들이 모두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이마에 솟은 땀을 손등으로 닦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길 좀 비켜주세요.”

“아이고, 아직 아 아이가, 혼자 어데 가노.” 선반에 누워 있는 남자가 물었다.

“혼자 아입니다 저쪽에 아버지가 있습니다.” 소녀는 꽤나 오랜만에 조선말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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