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TV와 행복

  • 입력 2003년 6월 16일 18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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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그릴라, ‘마음의 해와 달’이라는 뜻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는 이상향. 400년간 라마 교리를 받들며 살아온 순한 사람들. 교통 혼잡이라는 말이 없고 국민총생산 대신 국민총행복이 중시되는 나라. 히말라야 산맥 동쪽의 작은 불교국 부탄은 오랫동안 이렇게 묘사돼 왔다. 그런데 지난해 4월 국영무역회사 간부가 거액의 뇌물수수 혐의로 붙잡혔다. 이 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사리탑을 파헤친 도적떼가 나오는가 하면, 지금까지 돼지에게나 먹이던 마리화나에 중독된 사람들이 수백명씩 체포되고 있다. 국민들이 벌레 한 마리 죽이는 것도 큰 죄로 알고 살던 나라가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TV 때문이지요.” 영국 가디언지에 따르면 부탄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대답한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TV를 볼 수 없었던 이 나라에 46개 채널의 케이블방송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 1999년 8월. 그것도 대부분 미디어재벌 루퍼트 머독의 스타TV가 방영하는 폭력적 선정적 프로그램에 ‘폭격’을 맞으면서 살인 사기 마약 등 범죄가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거다. 부탄인들의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여학생 세 명 중 한 명은 하얀 피부 노랑머리의 미국인같이 되고 싶어 하고, 젊은 여성 세 명 중 한 명이 결혼 대신 섹스를 선호하며, 부모의 35% 이상은 아이들과 얘기하기보다 TV 보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됐다.

▷이 나라 국왕이 TV 시청을 허용한 것은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근대화 민주화도 중요하지만 영성을 중시하는 국가답게 왕은 국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행복이라고 여겨왔다. 국민총행복을 돈으로 잴 수는 없다고 믿었던 왕은 축구를 좋아하는 이 나라 국민들이 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운동장에 임시가설한 대형TV 중계를 보며 열광하는 것에 감동해 TV를 허가하기로 했다. 외국TV 개방에 앞서 부탄방송을 설립해 교육적 프로를 내보내도록 했지만 외국방송과 경쟁하는 건 불가능했다.

▷TV와 폭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어릴 때 TV 폭력장면에 많이 노출되면 어른이 되어서도 공격적 성향을 지닌다는 연구 결과도 적지 않다. 국경을 넘나드는 전파의 세계화가 서구, 특히 미국의 가치관 생활양식 미적 기준을 가장 고립된 나라까지 ‘오염’시키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TV가 다시 금지되기를 원하는 부탄인은 거의 없는 것 같다. TV 없는 무공해 행복과 TV 있는 유독한 행복 가운데 적어도 선택할 자유는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TV 바로 보기와 제대로 규제하기는 그다음 문제일 성싶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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