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때문이지요.” 영국 가디언지에 따르면 부탄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대답한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TV를 볼 수 없었던 이 나라에 46개 채널의 케이블방송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 1999년 8월. 그것도 대부분 미디어재벌 루퍼트 머독의 스타TV가 방영하는 폭력적 선정적 프로그램에 ‘폭격’을 맞으면서 살인 사기 마약 등 범죄가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거다. 부탄인들의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여학생 세 명 중 한 명은 하얀 피부 노랑머리의 미국인같이 되고 싶어 하고, 젊은 여성 세 명 중 한 명이 결혼 대신 섹스를 선호하며, 부모의 35% 이상은 아이들과 얘기하기보다 TV 보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됐다.
▷이 나라 국왕이 TV 시청을 허용한 것은 백성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근대화 민주화도 중요하지만 영성을 중시하는 국가답게 왕은 국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행복이라고 여겨왔다. 국민총행복을 돈으로 잴 수는 없다고 믿었던 왕은 축구를 좋아하는 이 나라 국민들이 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운동장에 임시가설한 대형TV 중계를 보며 열광하는 것에 감동해 TV를 허가하기로 했다. 외국TV 개방에 앞서 부탄방송을 설립해 교육적 프로를 내보내도록 했지만 외국방송과 경쟁하는 건 불가능했다.
▷TV와 폭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어릴 때 TV 폭력장면에 많이 노출되면 어른이 되어서도 공격적 성향을 지닌다는 연구 결과도 적지 않다. 국경을 넘나드는 전파의 세계화가 서구, 특히 미국의 가치관 생활양식 미적 기준을 가장 고립된 나라까지 ‘오염’시키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TV가 다시 금지되기를 원하는 부탄인은 거의 없는 것 같다. TV 없는 무공해 행복과 TV 있는 유독한 행복 가운데 적어도 선택할 자유는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TV 바로 보기와 제대로 규제하기는 그다음 문제일 성싶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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