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방송 개국35돌]『자유언론회복』 꿋꿋한 법정투쟁

  • 입력 1998년 4월 24일 19시 49분


《암울했던 60,70년대 독재와 폭압속에서도 ‘민족의 방송’‘민중의 소리’로 국민과 희로애락을 함께 한 동아방송(DBS). 그러나 80년 11월30일 ‘방송통폐합’이라는 신군부의 폭거로 끝내 비통한 최후를 맞아야 했던 그 동아방송이 25일로 개국 35주년을 맞았다. 동아방송이 목소리를 빼앗긴 지 17년. ‘역사 바로 세우기’의 구호는 요란했지만 역사는 바로 세워지지 않았다. 역사상 첫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뤄낸 지금, 빼앗긴 역사는 바로 세워질 것인가. 동아방송 개국에서 폐국까지, 그리고 동아방송 반환소송의 배경과 경위를 관계자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엮어본다.》

1963년 4월25일 개국한 동아방송은 민주화의 염원이 들끓던 4·19혁명의 산아(産兒)였다. ‘격조높은 민족의 방송’을 표방한 동아방송의 출범은 민의의 올바른 수렴이 절실하던 시대적 요구의 표출이었다.

개국한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청취율 1위의 고지에 올랐던 동아방송의 샛별같은 프로그램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취재기자가 직접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해 뉴스의 새 지평을 열었던 ‘뉴스쇼’를 비롯, 고 양주동박사가 단골출연한 최장수 교양오락프로 ‘유쾌한 응접실’, 국내 방송계에 디스크자키(DJ)시대를 연 ‘3시의 다이얼’, 최초의 음악 심야프로 ‘0시의 다이얼’, 그리고 ‘밤의 플랫폼’ ‘정계야화’ ‘고운정 미운정’ 등이 그것이다.

‘귀로 듣는 동아일보’로 공정하고 날카로운 보도에 매진했던 동아방송. 그로 인해 박정희정권과 긴장관계에 설 수밖에 없었고 개국 1년2개월만에 터진 ‘앵무새(정부비판칼럼) 사건’으로 제작관련자 6명이 구속되는 등 갖은 수난을 겪어야 했다. 10·26이후 민주화의 욕구가 봇물처럼 터진 80년 ‘서울의 봄’을 짓밟으며 들어선 신군부하에서도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언론에 대한 감시와 간섭, 탄압은 더욱 드세졌고 급기야 80년3월 보안사내에 언론대책반이 만들어지면서 ‘언론학살’은 시작됐다. 언론인 대량해직으로 칼을 빼든 신군부는 ‘언론창달계획 추진을 위한 언론사 대표 각서징구(徵求)계획’을 마련한 뒤 80년 11월12일 당시 동아일보사 김상만(金相万)회장과 이동욱(李東旭)사장을 보안사령부로 강제연행, 동아방송 포기 각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집요한 협박과 공갈에도 굴하지 않고 완강히 버티던 김회장은 더이상 폭압에 맞설 경우 막대한 정신적 재산적 피해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항거불능의 압박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기각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달 30일 밤12시 동아방송은 신군부에 의해 방송시간과 내용까지 철저히 통제된 고별방송을 내보내야 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여기는 동아방송입니다. HLKJ.”

4·19혁명으로 탄생한 민주방송, 청취율 1위의 국민방송, 가장 건실하게 운영되는 민간방송이었던 동아방송은 17년7개월만에 그렇게 전파를 멈췄다.

신군부가 동아방송을 빼앗아 KBS에 넘겨주면서 내세웠던 명분은 ‘공영방송 체제 구축’. 그러나 이는 철저히 사전 각본하에 진행된 ‘강탈행위’였다.

동아일보사측 변호인단이 최근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방송협회 회원인 방송사 관계자들이 내용도 모른 채 일제히 불려가 방송통폐합을 위한 ‘언론구조의 발전적 자율개편’을 결의한 시각이 80년 11월14일 오후6시. 그런데 이보다 3시간 전인 이날 오후3시 KBS는 제115차 이사회를 열어 “12월1일부터 동아방송 등 5개사의 8개 채널을 인수한다”는 ‘민방인수계획’을 의결했다. 신군부는 방송협회가 ‘자율결정’하기도 전에 이미 언론통폐합의 절차와 시점을 KBS측에 통보했다는 증거다.

‘공영방송 체제 구축’이라는 명분이 그야말로 허울에 불과했음은 그 뒤 곧바로 입증된다. 5공에 이은 6공 정권은 스스로 없앴던 민영방송을 90년 다시 허가했다. ‘공영’방송체제에서 ‘공 민영’방송체제로 정부의 정책이 바뀌어 다시 민영화로 되돌린다면 동아방송은 원소유자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동아방송은 엉뚱하게도 제삼자에게 넘어갔다. 6공 정부는 새로운 민영방송으로 서울방송(SBS)을 선정, 허가하면서 동아방송으로부터 빼앗은 채널을 SBS라디오에 넘겨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아방송 채널과 함께 80년11월 빼앗아 갔던 서울 구로구 오류동의 동아방송 송신소 부지는 그대로 KBS 소유로 남겨두는 이해할 수 없는 조치를 했다.

이를 두고 당시 한승헌(韓勝憲·현 감사원장서리)변호사는 “강탈한 재물을 장물이라 한다면 KBS는 첫번째 장물취득자요, SBS는 두번째 장물취득자라 하겠으며 정부는 이중으로 장물을 처분한 것”이라며 분노를 터뜨렸다.

87년 6·10항쟁으로 군사정권의 강압통치가 막을 내리고 언론기본법이 폐지되면서 통폐합됐던 몇몇 신문이 복간됐지만 동아방송에 대해서는 아무런 복원조치도 이뤄지지 않은 채 17년이 흘렀다. 국민의 힘으로 역사상 첫 정권교체를 이뤄낸 지금, 숨겨진 역사적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아울러 잘못된 정치적 행위로 인해 발생한 피해는 당연히 원상 회복되어야 한다.

〈김희경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