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종석/남북차관급회담에 거는 기대

  • 입력 1998년 4월 9일 19시 55분


참으로 오랜만에 열리는 남북회담이다. 쌀 15만t을 받아가면서도 거부했던 당국자간 회담에 북한이 나오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먼저 차관급 회담을 제의했다. 그것도 일방적 제의가 아니라 지난달 적십자 대표 접촉에서 있었던 우리측의 비공식 제안에 대한 공식 답변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다.

▼ 새정부 화해노선에 화답 ▼

이번 회담은 4년만에 이뤄지는 당국자간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자못 의미가 크다. 대개 북한이 새 정부의 대화노선에 일정기간이 지나면 호응해 오리라고는 예상했지만 새정부 출범 한달 남짓만에 회담을 제의해올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드물었다. 이렇게 빠른 대화제의는 북한이 비료문제라는 급박한 사정을 안고 있는데도 기인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들이 새정부의 화해노선을 긍적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정부의 대북정책은 이미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중이다.

북한은 이번 회담에서 의제를 비료지원 문제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비료문제 등 서로 관심사가 되는 문제들’을 협의하자고 했다. 이는 정부가 당면과제로 추진해온 남북이산가족 재회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의사표명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상황 진전에 따라서는 특사 교환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이번 회담에 임하면서 자칫 부차적인 문제가 본질 사안의 논의를 지체시키거나 왜곡시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 회담을 ‘원칙적인 합의 도출 후 각론 논의’의 순서로 이끌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회담 벽두에 먼저 비료 지원과 이산가족 재회 추진 등 핵심 사안에 대해서 포괄적인 원칙적 합의를 보는 것이다. 이때 우리측은 이산가족 재회 문제를 북한의 주관심사인 비료지원문제의 조건부로서가 아니라 분리해서 병행적으로 민족화해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원칙 합의가 이루어진 뒤에 비료지원 절차와 이산가족 재회 방법 등의 각론을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경우 각론에서 협상이 난항을 겪어도 총론적 합의가 이뤄진 상태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협상할 수 있는 틀이 마련될 수 있다.

정부는 이번 회담에서 북측에 ‘북한 지원과 남북간의 관심사항을 논의하기 위한’ 차관급 회담의 정례화를 제안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정부는 이 회담의 판문점 개최를 재차 제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북한이 일방적으로 무용화를 선언한 휴전체제가 현실적으로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남과 북은 남북기본합의서에서 ‘공고한 평화상태’가 이루어질 때까지 현 ‘군사정전협정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한 바 있다.

우리는 누구나 이번 회담의 성과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회담이 난항을 겪는다해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전략적 관점에서 볼때 지금으로서는 북한이 그렇게도 터부시하던 당국자회담에 나온 것 자체가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정부는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두며 회담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차관급 회담은 남북 모두에 새로 출발하는 당국간 대화의 긴 여정에서 첫 출발에 불과하다. 대화는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 큰 성과를 기대하기 보다는 이번 회담을 대화의 정례화로 나아가는 디딤돌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 대화 정례화 디딤돌로 ▼

한편 이제 새정부는 남북회담에서도 대화의 합리성을 제고하며 대화문화를 주도해 나가야 한다. 정부는 일방의 완전한 승리보다는 양쪽이 모두 승리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부분적 승리를 추구하도록 회담을 유도해야 한다. 정부는 이번 회담부터 ‘완승 완패’ ‘벼랑끝 전술’ 등 그동안 우리의 가슴에 절망감만을 층층이 쌓이게 한 극단적인 행동양식을 남북관계에서 퇴장시키는 데 주도적인 노력을 기울여주기 바란다. 이것이 새시대의 남북관계를 열고자 하는 새정부의 첫 당국자간 회담에 거는 우리의 또 다른 기대이다.

이종석<세종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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