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90)

  • 입력 1996년 10월 20일 20시 23분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기〈38〉 상현은 그 아이가 선배의 아이라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동안 자기에게 임신 사실을 숨겼다는 것이 결정적인 증거였다. 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혼을 하겠다고 밀어붙일 때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시간이 좀 지나면 흐지부지되 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 가 서류를 꾸며왔다. 그가 가정사에 그 정도 로 적극적인 참여를 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자기에게 닥친 일들을 넓게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혼이 자기 인생에 어떤 사건인지조차 실감하지 못했다. 나에 대한 증오, 그리고 인생 전반에 걸친 환멸…. 그런 코앞의 감정에만 격렬하게 반응했다. 그것이 그를 더욱 인도행에 집착하게 만 들었다. 내가 도장을 찍자 그는 소원대로 인도행 경비를 손에 넣게 되었다. 우리의 이혼이 이루어진 것은 짧은 시간 안에 결정해야만 할 상황이 있었기 때문 이었다. 시간을 끌면 결정이란 더욱더 어려워진다. 상현이 인도행 경비를 마련해야 할 시한이 촉박해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혼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헤어지던 날 그는 또 울었다.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배신의 상처가 너무 크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인도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도 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좌절을 당했고 이제 민중에도 사랑에도 다 배신당했어. 이 땅 에 환멸이 너무 커』 나는 오후 수업이 남아 있어서 다시 학교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끝까 지 들어줄 시간이 없었다. 법원 문을 나오며 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택시를 잡았 던 것은 순전히 그 이유였다. 차가운 날씨였다. 택시 안에서 보니 법원 담을 끼고 돌아서 가고 있는 그는 꽤 추 워 보였다. …외투도 안 입었구나. 나는 이제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를 막막히 쳐다보았다. 내 삶에 다시 그 를 만날 일이 있을까. 어제까지 함께 살던 사람을 단 하루가 지난 뒤 다시는 만나지 않을 관계가 되다니. 세상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든 일은 흘러가는 것이고 흘 러가면 그만이었다. 붙드는 순간 흘러가버리는 일에 집착한다는 것은 쓸쓸하다. 사 랑도. 마치 흘러가버리는 인생의 시간에 순응하듯 나는 택시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글 :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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