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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 타계 1주년… 동생 최수원 KBO심판의 望兄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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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 타계 1주년… 동생 최수원 KBO심판의 望兄歌

동아일보입력 2012-09-05 03:00수정 2012-09-0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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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공 꼭 쥐고 하늘구장 등판한 형… 삼진 삼진 삼진 퍼펙트게임 하겠죠 《 지난해 9월 14일 맏형이 떠났다. 53세의 한창 나이에 지병으로 눈을 감았다. 형은 경기 고양시 자유로 청아공원에 잠들어 있다. 납골묘 옆에는 형이 쓰던 낡은 글러브가 오롯이 놓여있다. 그라운드에서 거침없이 강속구를 뿌리던 무쇠팔이었던 형이 병마에 무너졌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공원 내 문자전광판. 하늘에 있는 형에게 하고픈 말을 보냈다. “형님, 잘 지내십니까? 보고 싶습니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금테안경을 쓴 형이 금방이라도 달려 나올 것만 같다. 그리운 형…. 》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1958∼2011)의 1주기를 앞둔 요즘도 막냇동생 최수원 심판(45)은 하루에도 몇 번씩 형 생각이 난다. 프로야구 경기 일정에 따라 전국을 순회하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마운드를 보면 형이 서있을까 주위를 둘러본다.

시간이 날 때마다 청아공원을 찾아 형을 추억한다. 형의 납골묘 앞에서 묵념을 하는 야구팬이 있을 때면 멀리서 지켜본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직도 최동원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음에 감사하다. ‘형이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었구나.’ 최 심판과의 인터뷰를 형에게 보내는 망형가(望兄歌)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 ‘아버지’같은 존재였던 형


아버지(최윤식·2003년 별세)는 삼형제 가운데 맏아들밖에 몰랐다. 형이 토성중 야구부에 들어갔을 때였다. 부산 사하구 괴정동에 200평 규모의 집 텃밭에 미니 야구연습장을 만들었다. 야간 훈련을 위한 조명시설까지 갖췄다. 투수로는 크지 않은 키(179cm)를 보완하기 위해 상체를 뒤로 젖힌 뒤 그 반동으로 공을 던지는 역동적인 투구 폼을 만든 것도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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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맏아들에게만 정성을 쏟는 아버지가 처음에는 미웠다. 나머지 두 아들은 찬밥 신세처럼 느껴졌다. 정작 제일 힘들었던 건 큰형이었다. 학교에서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수백 개의 공을 더 던졌다. 아버지와 함께 10km를 달렸다. 혹독한 조련을 묵묵히 견뎠다.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힘들다” “못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시키는 대로 따르던 효자였다.

우리 삼형제는 어릴 때부터 한 방을 썼다. 형은 두 동생에게 한없이 부드러웠다. 불평불만을 조용히 들어줬다. 동생들의 상대적인 박탈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6년 수영구 남천동으로 이사할 때까지 한 방을 쓰는 생활은 계속됐다. 그제야 형이 우리 집안의 대들보였음을 알았다. 형은 프로생활을 하며 집안살림을 챙겼다. 아홉 살 위의 형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형은 나의 롤모델이었다. 나 역시 투수를 꿈꿨다. 고교(경남고)와 대학(동아대)에서 야구 선수로 생활했지만 빛을 보지는 못했다. 투수와 야수를 오간 평범한 선수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친구의 권유로 1994년 야구 심판이 돼 1639경기(4일 현재)를 뛰었다. 형 대신 19년째 야구장을 지키고 있다.

○ 암과 싸우면서도 야구를 놓지 않던 형

“형님이 아직도 그라운드에 서 있는 것만 같아요.” 프로야구 최수원 심판은 지난해 9월 14일 지병으로 53세의 한창 나이에 별세한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의 삼형제 중 막냇동생이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형은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싫어했다. 몸이 아파도 어머니가 걱정할까봐 말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였다.

형은 은퇴한 뒤 1990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조브 클리닉에서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았다. 일상생활을 하기 위해서였다. 숟가락조차 들 수 없는 상태였다. 알고 보니 형의 어깨 인대는 이미 두 곳이나 끊어져 있었지만 현역 때는 이 사실을 몰랐다. 형은 “아파도 팀을 위해 공을 던지는 게 내 임무라고 생각했다. 무식하게 던진 거지”라며 웃었다.

형이 대장암으로 투병할 때도 그랬다. 한화 코치 시절인 2007년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당시 깨끗하게 나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5년 가까이 남몰래 투병생활을 했다. 이때도 주위에는 절대 비밀로 하라고 당부했다.

항암치료를 받는 형의 모습은 가슴 아팠다. 한 번 항암주사를 맞으면 한동안 식사를 하지 못했다. 지난해 초, 형은 항암치료를 더는 못하겠다고 했다.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대신 강원과 경기 양평에서 생식 등 민간요법을 시작했다. 그해 7월, 형은 모교인 경남고의 한 이벤트 행사가 열린 목동 경기장에 나타났다. 이미 병세가 나빠진 시기였다. 앙상하게 마른 몸에 배에는 복수가 찼다. 형은 “마지막으로라도 야구 유니폼을 입고 싶었다”고 했다. 그만큼 그라운드가 그리웠던 거였다.

2주일 뒤 형은 다시 입원했다. 의식을 잃는 횟수가 잦아졌다. 9월 초,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연락이 왔다. 가족 모두가 일산병원에 모였다. 형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형은 이름을 부르면 어렵게 눈을 떴다. 그런 아들에게 어머니는 야구공을 건넸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형의 손은 어느새 공을 잡고 있었다. 14일 새벽 형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건강해라”였다. 우리 가족은 돌아가며 형에게 “그동안 수고했어요”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쉬세요”라며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장례식에 앞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냉장시설로 옮겨지기 전 마지막으로 형의 얼굴을 봤다. 편안히 잠든 모습이었다. 금세 씩 웃으며 눈을 뜰 것만 같아 얼굴을 몇 번이고 쳐다봤다.

형이 떠난 지 1년이 돼가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문득 형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가슴이 텅 빈 느낌이다. 그래도 형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음에 행복하다. 형도 하늘에서 기뻐할 것이다.

정리=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동영상=‘무쇠팔’ 故 최동원 생전 투구 동영상
#최동원#최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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