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p Of Life] ③ 2002 월드컵 ‘12번째 선수’ 현영민

  • 스포츠동아
  • 입력 2018년 4월 13일 05시 45분


현영민은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12번째 선수’로 가슴 뛰는 시간을 보냈다. 비록 월드컵 본선 출전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은퇴했지만, 16년 전 한국축구의 신화를 후배들이 재현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제2의 축구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현영민은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12번째 선수’로 가슴 뛰는 시간을 보냈다. 비록 월드컵 본선 출전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은퇴했지만, 16년 전 한국축구의 신화를 후배들이 재현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제2의 축구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 “벤치에 있다고 좌절하지마, 너희도 팀 전술의 히든카드”

팬들은 내가 롱스로인으로 뽑힌줄
본선 7경기 내내 벤치를 지켰지만
심장은 그들과 똑같이 뛰고있었다

독일대회땐 기둥이 됐어야 했는데
프로서 잠시 교만해져 대표팀 제외
20%에 들려면 충분히 널 증명하라


한 팀 11명이 90분 내내 쉼 없이 달리며 골을 노리는 축구. 시간이 흐를수록 그라운드 안의 선수들은 거친 숨을 몰아쉰다. 스탠드를 메운 팬들은 한마음으로 선수들과 함께 호흡한다. 축구에서 ‘12번째 선수’는 흔히 그런 열광적 팬들을 지칭하는 말로 통한다. 그러나 12번째 선수는 관중석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벤치에 앉아 숨죽인 채 그라운드를 응시하는 대기선수들, 그들의 맥박수 또한 결코 그라운드 안의 베스트 11에 못지않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함께한 팬들이라면 23명 태극전사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할 터. 대부분 친숙한 얼굴들이지만, 이 가운데는 길거리응원의 함성이 끊이질 않았던 한·일월드컵 기간 내내 ‘12번째 선수’로만 머문 이들도 있다. 골키퍼 김병지와 최은성, 미드필더 윤정환과 최성용, 측면수비수 현영민은 단 한 경기에도 나서지 못한 채 4강 신화의 현장을 물러났다.

지금은 모두들 은퇴했다. 감독, 코치, 해설가로 변신한 그들은 이제 또 각자의 자리에서 한국축구의 현실을 고민하고 있다. 2002년부터 울산, 서울, 성남을 거친 현영민(39·SPOTV 해설위원)은 2002월드컵 멤버들 중에선 가장 늦은 지난해 12월 전남 유니폼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K리그 통산 437경기에서 9골·55도움을 올린 그는 성실함의 대명사였다. 단 한 경기 출전도 없이 월드컵을 마감했지만, 2000년대 초중반 각급 대표팀의 단골 멤버였다.

2002 월드컵을 앞두고 출전한 골드컵에서 현영민의 플레이 장면.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2002 월드컵을 앞두고 출전한 골드컵에서 현영민의 플레이 장면.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현영민이 누구야?

현영민은 대기만성형의 선수였다. 중·고교 때는 몸집이 작아서인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각급 청소년대표 경력 또한 전무하다. 건국대에 입학한 뒤에야 체격과 기량 모두 급성장했다. 그 덕에 대학 4학년 때인 2001년 일찌감치 울산의 레이더망에 포착됐고, 2002월드컵을 준비하던 거스 히딩크 대표팀 감독의 눈에도 들었다. 결국 몇 차례의 테스트를 거쳐 월드컵 멤버로까지 발탁됐지만, 당시 현장의 축구 관계자들 상당수도 ‘현영민이 누구야’라는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한 미스터리일지도 모르겠지만, 현영민이 히딩크 감독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축구경기는 11명만으로 치르는 것이 아니다. 교체선수를 포함해 대개는 경기당 14명이 출전할 수 있다. 또 한 대회를 치르려면 18∼23명이 필요하다. 물론 주전과 후보의 구분은 있지만, 18명이든 23명이든 모두가 한 팀원이다.

현영민 스스로 생각하는 2002월드컵 대표팀 발탁의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팬들은 (내 장기인) 롱스로인 때문에 대표팀에 뽑혔다고 말씀들 하시는데, 틀린 얘기는 아닌 것 같다(웃음). 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로 히딩크 감독님이 나를 뽑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월드컵) 엔트리를 확정하기 전에 A매치를 치르면서 내 본래 포지션인 왼쪽 윙백뿐 아니라 중앙수비수, 수비형 미드필더, 오른쪽 측면에 두루 기용해주셨다. 주전이나 교체순번 1순위의 선수까지는 아니어도 누군가 빠질 때 멀티플레이어로 투입할 수 있겠다는 판단으로 뽑아주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국가대표 시절 현영민.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국가대표 시절 현영민.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벤치 멤버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명의 선수가 월드컵 출전 기회를 잡았으니, 한마디로 파격이었다. 그러나 ‘신데렐라 스토리’는 거기까지였다. ‘히딩크호’가 터키와의 3·4위전(6월 29일·대구·2-3 패)을 포함한 7경기를 치르는 동안 줄곧 벤치를 지켰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선수는 실망하거나 좌절하는데, 현영민은 달랐다.

“사실 팀에 속하게 되면 내가 주전인지, 교체인지, 그것도 못되는 선수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벤치에 있는 선수에게는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하다. 교체 카드는 경기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팀 전술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경기에 투입되면 제 몫을 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경기에 나가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하고 불만을 터트리는 순간, 팀 분위기는 깨진다.”

경기에 나서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진 않았다. 쟁쟁한 선배들과 또래들의 틈바구니에서 나름의 생존법도 터득했다.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이며 스스럼없이 녹아들었다. 현영민은 “경기에 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벤치에 앉아 감독님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감독님이나 코치님들 앞에서 일부러 더 열심히 운동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애쓴 적도 있다”고 웃고는 “당시 대표팀에선 이영표 선배나 이을용 선배가 나보다 훨씬 뛰어났다. 또 최성용 선배나 윤정환 선배도 경기에 못 나가는데 내가 이런저런 얘기를 할 처지는 아니었다”고 손사래를 쳤다.

거스 히딩크 감독-현영민(상단 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거스 히딩크 감독-현영민(상단 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현영민이 기억하는 히딩크는?

히딩크 감독은 한국에 부임한 뒤로 줄곧 언론과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과거 절친하게 지내던 일부 국가대표선수들과 취재기자들 사이에도 명백한 선을 그었다. 취재진이 숙소 앞에 대기하는 것조차 탐탁치 않게 여겼다. 이 때문에 대표팀은 히딩크 감독의 철저한 통제 하에 갇혀 지내는 인상을 풍겼다. 실상은 좀 달랐다는 것이 현영민의 기억이다.

그는 “당시 대표팀 생활을 되돌아보면 숙소에선 비교적 자유로웠다. (주장 홍명보의 룸메이트로 알려져 있는데) 그건 아니다. 당시 대표팀은 1인1실을 사용했다”며 “(차)두리나 (이)천수랑 또래여서 잘 어울렸다. 폴란드전(6월 4일·부산·2-0 승)을 마치고 나선 천수와 함께 모자를 푹 내려쓰고 호텔 밖으로 잠깐 외출을 나가 해운대 바닷가를 거닐었던 적도 있다”고 말했다.

대표팀이 승승장구하자 가는 곳마다 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던 때였다. 대표적으로 김남일은 지금의 그 어떤 아이돌 스타에도 밀리지 않는 인기를 누렸다. 자칫 분위기에 취해 실수라도 하면 경을 칠 법한데도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에게 규율 못지않게 자율을 보장했던 것이다.

조별리그를 1위로 통과했지만 대표팀에도 몇 차례 큰 위기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16강 진출의 분수령이 된 포르투갈전(6월 14일·인천·1-0 승)이었다. 1승1무라 유리한 국면이었으나, 우승 후보 포르투갈에 패하면 탈락의 고배를 들 수도 있었다.

대표팀도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현영민은 “미국에 이길 수 있었는데 비긴 뒤(6월 10일·대구·1-1) 포르투갈전을 앞뒀을 때가 가장 위기였던 것 같다. 포르투갈은 루이스 피구를 비롯한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많아 우승 후보였다. 그 경기에서 지면 16강에 오르기 힘들었다. 경기에 앞서 홍명보 선배와 황선홍 선배를 중심으로 각오를 다졌는데, ‘다시 시작하자’는 얘기였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포르투갈을 꺾고 16강 진출에 성공하자, 반대로 안도감(또는 성취감) 때문에 대표팀 분위기는 다소 이완됐다.현영민은 “이탈리아와 16강전(6월 18일·대전·연장 2-1 승)을 치러야 하는데, 사실 분위기가 좀 들떠 있었다. 포르투갈전 이틀 뒤 훈련을 마치고 히딩크 감독님이 선수들을 다그쳤다. 나중에 (언론을 통해) ‘나는 아직 배고프다’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선수들에게 그런 자신의 의지를 이미 주입시키셨다”고 밝혔다.

현영민.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현영민.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2002월드컵 때는 벤치 신세였지만, 4년 뒤 독일월드컵에선 기둥이 됐어야 했다. 그러나 현영민은 2005년을 끝으로는 태극마크와 인연이 끊어졌다. 프로에선 나름 성공적 이력을 써내려가던 때였는데, 월드컵 경기 출전은 영원히 ‘미완의 꿈’으로만 남게 됐다. 현영민은 이 또한 ‘마음가짐’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그는 “2005년까지 매번 대표팀에 뽑혔다. 2005년에는 울산이 리그 우승도 차지했다. 그래서인지 교만해졌다. 결국 딕 아드보카트 감독님이 오시고, 대표팀에서 제외됐다. 선수라면 누구나 유럽무대에서 뛰고 싶은 꿈을 품을 텐데, 대표팀에 뽑히지 못하고 독일월드컵에도 못 나가게 된 것이 자극이 돼 러시아(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2006년 1∼7월)로 이적했다”고 털어놓았다.

현영민은 자신의 이 같은 쓰라린 경험담을 후배들이 반면교사로 삼아 분발해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올해도 러시아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 엔트리가 차츰 좁혀질 텐데, 후배들에게 ‘국가를 대표한다’는 사명감을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아니라도 그 자리에 뛸 수 있는 선수들은 많다”며 “신태용 감독님이 유럽전지훈련(3월) 명단을 발표하면서 ‘80%는 완성됐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머지 20%에 들고 싶은 선수들이라면 자신의 역량을 다 발휘하고 충분히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12번째 선수’ 현영민의 눈에는 그 때도, 지금도 여전히 ‘나보다 우리’가 먼저 떠오르는 듯하다.

현영민.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현영민.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 현영민은?

▲생년월일=1979년 12월 25일(전남 구례)
▲출신교=경희중~경희고~건국대
▲포지션=수비수(DF)
▲K리그 선수 경력=울산현대(2002~2009년), FC서울(2010~2012년), 성남일화(현 성남FC·2013년), 전남 드래곤즈(2014~2017년)
▲K리그 통산 성적=437경기 9골 55도움
▲국가대표 경력=U-23 대표(2002부산아시안게임), A대표(A매치 15회)

정재우 전문기자 ja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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