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가 가장 먼저 쫓겨나… 산업단지 주변 원룸촌은 유령마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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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겨울’ 울산 가보니

13일
 울산 남구 울산고용센터를 찾은 구직자들이 실업급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조선, 자동차 같은 제조업에서 실직한 40대 
구직자도 적지 않았다(왼쪽 사진). 제조업 구조조정이 계속되면서 울산 북구 자동차 산업단지에서는 공장을 내놓는다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 있다. 울산=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13일 울산 남구 울산고용센터를 찾은 구직자들이 실업급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조선, 자동차 같은 제조업에서 실직한 40대 구직자도 적지 않았다(왼쪽 사진). 제조업 구조조정이 계속되면서 울산 북구 자동차 산업단지에서는 공장을 내놓는다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 있다. 울산=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고용시장이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 정부는 진단하지만 ‘질 좋은 일자리’로 꼽히는 제조업 취업자 수는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다. ‘제조업의 심장’으로 꼽히는 울산에서 만난 지역 제조업 관계자와 실직자, 주민들은 “제조업 일자리 한파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제조업 구조조정의 직격탄은 40대에서 두드러졌다. 실직한 40대들은 “제조업은 구조조정이 계속돼 희망이 없는데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막막해했다.》


“조선업 수주가 늘어나고 있다는 건 대기업 얘기지 그 물량이 자회사나 하청업체까지 내려오지는 않고 있어요. 구조조정이 계속되면서 나 같은 40대가 제일 먼저 쫓겨나고 있습니다.”

11일 오후 울산 남구 울산고용센터에서 홍모 씨(40)가 한숨을 내쉬었다. 홍 씨는 1년간 대우조선해양의 자회사를 다니다 지난달 권고사직을 당했다. 실업급여를 받으러 이날 고용센터를 찾은 그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 조선사에 다시 취직하고 싶어도 갈 곳이 없다”고 기자에게 애로를 토로했다. 홍 씨는 “업계는 미래가 안 보이고 회사를 나가 장사하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망해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배경화면에는 어린 두 딸이 웃고 있었다.

정부는 조선업을 비롯한 제조업의 구조조정이 일단락되며 고용이 회복세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제조업의 심장’이라는 울산 지역의 실직자와 주민들을 만나보니 한창 일할 40대가 제조업 일자리 한파의 직격탄을 맞고 있었다. 실직자들은 “30대는 젊고, 50대는 정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이유로 40대가 구조조정의 집중 대상이 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 40대 일자리 한파는 현재진행형

울산 북구 효문동 자동차산업단지에는 공장 건물이나 부지를 매매한다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 있었다. 자동차 부품업체 B사의 김모 총무실장(49)은 “자동차 업계 불황으로 잘나가던 1, 2차 협력업체들도 많이 파산했다”며 “우리 회사는 그나마 건실한 편이지만 매출이 크게 감소해 지난해부터 신규 채용을 대폭 줄였다”고 말했다. 제조업 구조조정이 이어지면서 양질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도시를 받쳐주는 제조업이 힘을 잃자 산업단지 주변의 상가와 주거단지도 덩달아 활기를 잃고 있다. 11일 오후 6시경 울주군 온산읍 온산국가산업단지 인근 원룸촌 거리는 퇴근시간인데도 사람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한산했다. 온산산단은 홍 씨가 다녔던 회사를 비롯해 조선회사 하청업체 등이 밀집해 있다. 도로변에는 조명을 환하게 밝힌 고깃집과 각종 식당이 늘어서 있었지만 어디 하나 사람으로 북적이는 곳이 없었다. 손님 없이 텅 빈 가게도 적지 않았다.

온산읍 한 마을의 이장이라는 엄모 씨(여)는 “조선업이 어려워지면서 산업단지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줄어 ‘유령마을’이 됐다”며 “원룸 중 절반은 비어 있다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엄 씨는 “한때는 빈방을 찾기가 어려운 동네였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택시기사 최모 씨(63)는 “공장마다 사람을 줄이면서 3교대가 2교대로 바뀌니까 ‘울산 사람들 술 마실 시간이 없다’고 한다”며 “밤마다 번쩍이던 번화가는 예전만 못해 나도 손님을 별로 태우지 못한다”고 말했다.


○ 2, 3차 협력업체 공장 매물 급증

울산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다. 공장 매입을 전문으로 하는 부동산사업자 황광진 씨(57)는 “상대적으로 탄탄한 1차 협력업체가 많은 울산은 그나마 덜하지만 경주 외동읍처럼 2, 3차 협력업체가 몰린 지역은 망한 회사가 많아 올해만 공장 매물이 수십 개가 나온 걸로 안다”고 말했다. 경기 불황의 여파로 이미 일자리가 많이 사라졌다는 얘기다.

현대자동차에서 1년 10개월간 기간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이달 초 퇴직한 우모 씨(42)도 이날 울산고용센터를 찾았다. 실업급여신청서를 손에 쥔 우 씨는 “나처럼 놀고 있는 40대가 수두룩하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우 씨는 “회사가 전기차 생산을 늘리려고 하면서 정년퇴직자의 빈자리에 구조조정이 쉬운 기간제만 뽑고 있다”며 “기간제마저도 인원을 줄이고 있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제조업 구조조정에 따른 40대 일자리 한파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진단하고 있다. 전기차와 수소전기차 생산이 본격화되면 자동차 협력업체들은 지금보다 훨씬 심각한 구조조정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40대 제조업 일자리의 불안정성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다. 한국노동연구원 허재준 고용정책연구본부장은 “40대 취업자 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는 것은 제조업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라는 의미”라며 “제조업 구조조정이 이제 시작 단계인 만큼 정부가 경제 현실을 엄중하게 인식해 일자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울산=송혜미 기자 1am@donga.com

#울산#조선업#제조업#40대#일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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