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재기자의 티비夜話] “이제는 여학생들에게 스포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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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3일 19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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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학교체육 개혁특집③-미녀들의 반란>

카메라는 하늘에서 남녀 고등학교 점심시간의 상반된 풍경을 비쳐준다.

남학교 운동장은 공을 좇는 학생들로 가득하지만 여학교 풍경은 한적하기 그지없다. 점심식사를 끝낸 여학생들은 삼삼오오 운동장 주변 그늘에 모여 수다를 떨거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린다. 언뜻보면 낭만적인 청춘의 한 페이지로도 비친다.

다음 순간 카메라는 학교 체육 선진국인 미국과 일본 고등학교로 점프한다. 남학생과 똑같이 과격하고 활달한 스포츠를 즐기는 미국, 그리고 사회체육의 선두주자인 일본 여고생들의 방과후 스포츠 시간 풍경이 펼쳐진다. 이들도 입시 지옥에 시달리는 것은 매한가지지만 스포츠로 스트레스를 풀고 사회성을 길러나간다.

공영방송인 KBS가 가을부터 야심차게 선보인 <학교체육 개혁특집>은 시청자를 깊은 절망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사회고발 다큐멘터리다. 기대치 이상을 거두는 올림픽 메달 순위, 세계의 찬사를 받은 '김연아 성공신화' 등을 통해 스포츠 강국이란 자기최면에 빠져 있는 한국사회에 뼈아픈 경종을 울리기 때문이다.

● 우리의 학원체육 어디가 어떻게 문제인가?

한국의 학원스포츠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꽤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이른바 '엘리트 체육' 비판론이다.

WBC를 계기로 요즘 가장 널리 회자되는 통계치는 '4000 대 50'일 것이다. 일본의 고교야구부 숫자가 4000여 개가 넘는데 비해 우리 고교야구부는 50여개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놀랍게도 이 숫자는 한국 엘리트 체육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불과 50여개로 4000개와 막상막하의 실력을 뽑아낸다는 궤변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같은 통계적 근거 없이도 한국에서 정규 교육과정을 마친 이라면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진실이 있다. 거의 모든 수업시간을 반납하고 순위에만 집착하는 운동부<1부-운동과 공부 희망방정식>와 정규 체육 시간마저 입시철이 되면 국영수 중심의 자율학습으로 대체된 입시지옥의 현장<2부-아이들의 심장을 뛰게 하라>이 그것들이다. 다큐멘터리는 이런 현실을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나아가 3부 <미녀들의 반란>편에 등장한 우리 여학생들의 현실은 그간 '엘리트 체육' 비판에 머물러 있던 학원스포츠 고발의 지평을 넓혔다.

"달리기를 할 때 여학생들은 자신의 드러난 앞이마를 손으로 가리고 달려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예뻐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흉하다고 생각하는 거죠."(평촌중 체육교사)

"윗몸일으키기를 시키면 여학생들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아요. 힘을 쥐어짜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거죠. 남여공학이 아니었다면 그랬을까 싶어요. 매달리기 1초도 못하는 애들도 부지기수고…"(누원고 체육교사)

사실 "여자가 웬 운동이냐?"란 생각처럼 우리사회에서 강하게 뿌리내린 편견도 흔치 않다. 문제는 이 같은 생각이 여학생들의 내면에 깊숙이 각인돼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 여학생들의 절대다수인 71%가 수업 시간 외에는 '전혀' 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통계라니, 여학생들은 '예쁘고 공부만 하는 기계'로 길러지고 있다는 얘기다.

● 여학생들은 예쁘고 공부만 잘하면 그걸로 끝?

명문학교일 수록 단체 스포츠를 권장한다. 사진출처 동아일보 자료사진
명문학교일 수록 단체 스포츠를 권장한다. 사진출처 동아일보 자료사진
청교도 사회인 미국이나 신분제가 강고했던 일본은 이 같은 고민을 겪지 않았을까?

방송에서는 미국은 이를 제도로 풀어냈다고 소개한다. 1971년 제정된 '타이틀 나인(9)'이란 "학교에서 남학생에게 스포츠를 지원한다면 여학생들에게도 똑같은 지원을 해야 한다"는 법률을 말한다. 남자 야구부가 만들어졌다면 여학생 야구부도 만들어져야 하고 이를 위해 라커룸과 샤워시설, 코치가 여학생들에게도 지원돼야 한다는 얘기다.

이 제도가 실시된 지 30년이 넘어진 지금 미국 고교에서는 900%, 대학에서는 400%의 여학생 스포츠맨이 늘어났다.

방송에서 소개된 미국 리지우드 고등학교 체육부장은 "여성이 하루 평균 1시간 운동한다면 유방암을 비롯한 여성암은 획기적으로 줄고 심지어 마약을 사용할 확률까지 감소한다"며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스포츠가 더 좋은 학업성적을 보장하고 사회성까지 증진하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이제 한국에서도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게 됐다. 학교성적순 대로 사회에서 성적이 매겨지지 않는 이유는 '실력'이나 '체력'도 문제지만 상당부분은 '사회성'이란 요소가 작동하는 것 아닐까. 고교 졸업 때까지 단 한번도 팀플레이를 해 본 적이 없는 책벌레 학생들은 '팀을 위한 희생'이나 '동료를 위한 패스'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사회로 떠밀려 나온다.

영국이나 미국의 명문 사립학교들이 왜 학생의 중요 평가지표로 럭비나 축구 같은 단체 스포츠를 집어넣는지도 점차 설명이 쉬워진다. 하지만 그 소중한 스포츠 교육의 장에서 우리 여학생들은 여전히 2등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의 원인이 이를 강제한 사회인지 여성 개인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 방송 분에는 '미수다'에 출연한 외국 여대생들이 등장해 땀나는 걸 싫어하는 우리 여학생들을 향해 이렇게 질타한다.

"한국 여성들은 과격하고 땀나는 것은 싫다는 건데…, 미국 여성들은 모든 운동을 남성들과 똑같이 한다. 한국 젊은 여성들이 운동 안하는 것만은 절대 이해 못하겠다."(미국인 윈터)

#결정적 장면.

'학교체육 개혁특집③' 11월22일 밤 11시30분 방송분. 한국에서도 스포츠 스타로 성공한 여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여고생 씨름 천재 이연우(17) 선수. 씨름에 입문한 지 8개월 만에 전국 대회 4강에 드는 실력을 갖춰 화제를 모았다. 익스트림 스포츠인 BMX(Bicycle MotoCross)계의 김연아라 불리우는 박민이(19) 선수도 있다. 국내 유일 여성 BMX 선수인 그는 동양인 최초로 세계대회 1위를 차지했다. 알게 모르게 우리 주위에 박세리와 김연아 같은 실력파 여성 스포츠인들이 급증한 것.
그러나 그들의 일상을 찬찬히 따라가 본 카메라는 한국에서 성공한 여학생 스포츠 스타들은 학교의 지원이나 제도적 동기유발보다는 아버지의 바지바람에 힘입은 점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포츠를 택한 이들 또한 스포츠 교육의 기본이념인 '사회성'을 증진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인 것이다.

정호재 기자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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