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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선언서’ 日감시뚫고 도착… 경성과 동시에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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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선언서’ 日감시뚫고 도착… 경성과 동시에 “독립 만세”

안영배 논설위원 입력 2019-08-24 03:00수정 2019-08-24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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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70화> 평북 의주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정인 통군정은 북한의 보물급 문화재이다. 의주읍에서 제일 높은 삼각산 봉우리에 자리 잡은 이 누정에서는 의주읍내와 압록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일제는 이곳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의주읍의 독립만세운동을 감시했다. 사진 출처 ‘의주군지’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0분경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내 서부야소교(의주서교회) 인근 공터. 의주서교회와 의주지역 유지들이 후원해 설립한 양실학교의 교사와 학생, 학부형 등 의주군민 700∼8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어서 모임은 교회 대부흥회처럼 보였지만, 이는 한반도 최북단에서 맨 처음으로 진행된 독립선언식이었다.

행사를 주관한 유여대 목사는 당초 경성에서 작성한 3·1독립선언서를 받아 경성과 동시에 독립선언식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문서 도착이 늦어지자 더 이상 지체할 순 없다는 판단에 따라 행사를 결행하기로 했다. 이날 사전 배포된 독립선언서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은밀하게 수집한 도쿄의 2·8독립선언서였다.(안석응 외 6인 판결문, 유여대 신문조서)


○ 2·8독립선언서의 등장


모임 장소는 순식간에 독립선언식 무대로 꾸며졌다. 운천교회 장로 허상련이 준비한 대형 팔괘국기(八卦國旗·태극기) 두 장이 임시로 만든 단상에 세워졌고, 종이로 만든 소형 태극기 100여 장이 참석자들에게 나누어졌다. 유 목사의 지시를 받은 안석응 등은 미리 등사해둔 200∼300여 장의 2·8독립선언서를 의주군내 평안북도 도청과 경무부, 기타 관청, 지역주민들에게 배포했다. 도쿄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사용했던 2·8독립선언서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식선언서로 선보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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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는 ‘찬미가-기도-식사(式辭)-독립선언서 낭독-독립창가 합창-만세-의주성 행진’의 순으로 진행됐다. 기도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특별한 손님’이 맡았다. 압록강을 경계로 의주군과 마주하는 중국 안동현(현 단둥)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김병농 목사였다. 그는 같은 해 2월 중국 상하이를 거점으로 국내외 연계 독립선언운동을 도모하던 동제사(同濟社) 요원 선우혁을 만나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약속했다. 압록강 철교 건너 안동역(단둥역) 부근에 있던 그의 집은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외 연락과 통신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김병농 목사가 독립의 염원을 담아 기도하는 동안 기적처럼 3·1독립선언서가 식장에 도착했다. 이에 유여대 목사는 2·8독립선언서 대신 민족대표 33인 중 14번째로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는 독립선언서를 소리 높이 낭독했다. 황대벽과 김이순이 독립선언서의 의미를 소개하는 연설을 하자 이에 호응한 “조선독립만세” 함성이 압록강변까지 퍼져갔다.

33인 민족대표 중 한 명인 김병조 목사는 1920년 상하이에서 출판한 ‘한국독립운동사’에 당시 상황을 이같이 소개했다. “공중에 펄럭이는 팔괘국기는 선명한 색채가 찬란하고 벽력과 방불한 만세 부르짖음 소리는 뜨거운 피가 비등하매 통군정(統軍亭·의주군 의주읍에 있는 조선시대 누정) 숙운(宿雲)에 놀란 학(鶴)이 화답하여 울고, 압록강의 오열(嗚咽)하는 파도에 물고기와 자라가 고개를 내밀고 듣더라.”

마침내 행사의 마지막인 의주성 일대를 도는 시위행진이 시작됐다. 학생들을 선두로 한 시위대는 태극기와 함께 ‘독립 창가’를 부르며 주민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독립선언을 함은 3월 1일 오늘이라/반도의 강산 너와 내가 함께 독립만세를 환영하자/충의를 다하여 흘리는 피는 우리 반도의 독립의 준비라/4000년을 다스려 온 우리 강산을 누가 강탈하고/누가 우리의 정신을 바꿀 수 있으랴/만국평화회의의 민족자결주의는 천제(天帝)의 명령이요/자유와 평등은 현시(現時)의 주의(主義)인데/누가 우리의 권리를 방해할소냐.’

놀란 일제 헌병들이 달려와 시위대에 해산을 요구했지만 규모는 오히려 늘어나 2000여 명으로 커졌다. 행사 직후 유여대 목사와 안석응, 김창건, 김두칠, 장창식, 강용상, 정명채 등 주동자 7명은 일제 헌병에 구속됐지만 시위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경성의 3·1운동과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전개된 의주 독립만세운동은 33인 민족대표가 현장에서 민중을 직접 지도하며 만세운동을 벌인 유일한 사례다. 유여대 목사는 처음부터 경성이 아닌 의주 지역 일대에서 독립선언식을 이끌겠다고 다짐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김승태, ‘의주에서의 3·1운동과 유여대 목사’)

1919년 3월 1일 의주읍 만세운동으로 일제에 체포돼 감옥살이를 한 김병농 목사, 김두칠 지사, 정명채 지사(왼쪽부터).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일제는 국경도시인 의주에서 독립선언서가 뿌려진 사실에 경악했다. 독립선언서의 해외 유출을 극도로 경계하던 일제는 선만(鮮滿·조선과 만주) 국경선 경계를 더욱 강화했다. 그러나 만세운동이 벌어진 3월 1일 이미 경성에서 작성된 3·1독립선언서는 압록강 철교를 건너 중국으로 가는 기차에 실려 있었다. 그 도착지는 김병농 목사의 집이었다. 김 목사가 의주 3·1운동에 참석하는 동안 독립선언서는 그의 아들(김태규·후에 의열단원으로 활동)을 통해 상하이의 현순 목사에게 전달된다.


○ 농민과 천도교인까지 가세

의주 만세운동은 이후 일제가 황해도 수안군, 경기도 안성군과 함께 ‘대표적 폭동 사건’으로 지목할 정도로 치열하고 끈질기게 전개됐다.

의주 만세운동은 3월 1일부터 6일까지 계속됐다. 2일에는 읍내 시위와는 별개로 남대문(남문) 밖 광장에서 최동오, 최안국 등 천도교인들이 지역농민 등 30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일제 헌병대는 무장을 풀지 못한 채 철야로 경계했지만 3일에도 1200여 명이 읍내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같은 날 의주 공립농업학교와 보통학교에서도 훈도(교사)와 학생들이 교정에서 모여 독립선포식을 거행했다. 이들은 “당신들(일본인 교직원)이 조속히 물러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등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수업 거부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4일과 6일에는 의주 만세운동의 진원지였던 양실학교 학생들이 단독으로 시위를 벌였다. 5일에도 의주군 수진면 수구진과 의주읍 서쪽 소관관(所串錧)에서 시위가 펼쳐졌다.(이용철, ‘평안북도 의주지역의 3·1운동’)

의주읍의 의주공립농업학교 본관. 한국인 교사와 학생들은 일본인 교직원들의 퇴출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와 동맹 휴학 등을 통해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사진 출처 ‘의주군지’
계속되는 시위에 일본 군경은 더욱 강압적인 자세로 나왔다. 시가지에 네다섯 명이 모이는 일도 허락하지 않았고, 통군정의 높은 곳에 기관총을 설치하며 시가지 경계를 강화했다.

하지만 지역주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식을 줄 몰랐다. 상인들은 철시로, 직공들은 파업으로, 학생들은 휴학으로, 농민들은 양곡과 땔감의 반출 매매 중단으로 일제를 괴롭혔다. 일제 경찰은 고시문을 발표하며 상점을 열도록 유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조선인 관리들도 동맹퇴직을 결의하고 사직서를 제출한 뒤 상하이로 탈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상황이 악화되자 일제는 무자비한 대응을 시작했다. 특히 군인들은 노약자와 어린이들을 살해하거나 부녀자들을 겁탈했다. 재물을 약탈하고, 교회당과 민가를 불태웠다.(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 10여 일간의 주민 자치

의주읍 시위는 3월 6일을 고비로 한풀 꺾이지만 주변지역의 만세운동은 4월 초까지 격렬하게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유혈 충돌로 인한 참극도 발생했다. 3월 30일 의주군 고령삭면 영산시장에서 펼쳐진 시위가 대표적이다.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등 3000∼4000여 명이 대규모 연합 시위를 벌이다 일제 헌병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흥분한 시위대는 투석전으로 맞서며 일제 헌병의 총 2정을 빼앗고, 헌병 건물 일부를 파괴했다. 이에 군인 11명이 출동해 시위대 5∼7명을 총격해 사망하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사망자 친족들이 시신을 메고 헌병주재소를 찾아 통곡하며 “독립이 성취되기 전에는 절대로 장례를 치르고 땅에 묻을 수 없다”고 하자 헌병들이 이들을 마구 때리며 쫓아내기도 했다.(‘한국독립운동지혈사’)

이때 옥상면에서는 독립을 구호로만 외치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일이 발생해 눈길을 끈다. 옥상면민 약 3000명은 4월 2일 옥상면사무소로 몰려가 “우리는 이미 독립을 선언하였으니, 금일 이후 면사무소는 마땅히 폐지하고 우리가 새로 조직할 자치민단에 면사무소 청사와 비품 재산 등 일체를 넘겨라”고 요구했다. 이후 면사무소를 접수해 비품과 공부(公簿) 7책, 현금 193원45전을 압수하고 10여 일간 자치업무를 집행했다. 이 일로 주동자 일부는 일제에 붙잡혀 징역형을 살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의주군에서 4월 초까지 만세운동 중 총격에 사망한 사람은 최소 20∼22명에 달한다. ‘독립운동지혈사’의 독립운동일람표에선 의주군의 경우 31명의 사망자, 350명의 부상자, 1385명의 투옥자가 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주군의 독립만세운동이 그만큼 치열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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