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순간]어머니, 피란길 발에 박인 굳은살로 61년 버텼습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7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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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룡이 1·4후퇴 때 평양서 모친과 헤어지던 날

김응룡은 누군가가 ‘사장님’이라 부르면 딴 놈을 부르겠거니 그냥 지나쳤다. 대신 ‘감독님’이란 호칭에는 정신이 번뜩인다. 아직도 감독을 하고 싶단다.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복궁 돌담길에선 ‘김 감독’이 잠시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잠겼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김응룡은 누군가가 ‘사장님’이라 부르면 딴 놈을 부르겠거니 그냥 지나쳤다. 대신 ‘감독님’이란 호칭에는 정신이 번뜩인다. 아직도 감독을 하고 싶단다.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복궁 돌담길에선 ‘김 감독’이 잠시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잠겼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 멋모르고 따라나선 길이었다. 아버지를 따라나서면 그냥 재미날 것 같았다. 미군이 던져주던 초콜릿 맛도 새삼 기억이 났다. 딱 세 밤만 자고 오면 된다고 했다. 얼음장 같던 1월의 대동강을 건너면서도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세 밤이 지나 돌아올 때는 대동강이 꽝꽝 얼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버지의 억센 손에 이끌려 서울에 도착해서도 그랬다. 대전에서, 또 대구에서 몇 달씩 지낼 때도 ‘세 밤만 자면’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면서 부산까지 흘러갔다. 잠깐 친척집 가는 것처럼 가벼운 차림으로 나온 까닭에 사진 한 장, 징표 하나 챙기지 못했다. 결국 어머니와 동생들의 얼굴마저 가물가물해질 무렵 깨달았다. 평생 이렇게 떨어져 살 수도 있겠구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품 안의 온기만큼은 더 또렷해졌다. 》
61년 전, 열 살배기 김응룡(71·프로야구 삼성라이온즈 고문)은 가족과의 생이별을 그렇게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 인사 한마디 없이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다 “나를 무척 좋아하셨다”는 후렴구가 따라 나왔다. 형은 위로 열 살 터울이었다. 큰누나는 일곱 살, 작은누나와도 다섯 살 차이가 났다. 김응룡은 적어도 그의 기억 속에선 어머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우리 시골서 닭 한 마리 잡으면 그 닭 발라서 곰국에 얹어주거든. 그럴 때면 (어머니가) 부엌으로 날 불러. 그래서 닭 머리랑 다리를 쥐여주곤 했지.”

아래로도 여동생이 셋이었지만 어머니는 늘 둘째 아들을 먼저 챙겼다. 그런 사랑은 아들의 머리가 아닌 가슴에 새겨졌다. 그는 이제 어머니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날의 기억이 더 아프다.

1·4후퇴 때였다. 평남 평원에 살던 그의 가족은 일단 평양의 이모네 집으로 몸을 피했다. 평양에도 곧 북한군이 들이닥칠 거라고들 했다. 어머니는 당시 여덟째를 품고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방에서 거동조차 하지 못할 때 아버지가 집을 나섰다. 국군이 3일만 있으면 다시 올라오니 딱 그때까지만 피해 있을 요량이었다. 아버지와 큰누나가 나선 길을 그도 따라 나섰다. 방에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 “간다”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괜한 늑장을 부리다 아버지가 자신을 떼어놓고 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만 앞섰다. 아버지와 누나가 든 짐에는 3일간 먹을 쌀과 고추장, 그리고 덮고 잘 이불 하나가 전부였다. 누구 하나 눈물겨운 이별장면을 연출하지 않았다. 그냥 잠시 다녀오겠거니 했다.

“벌써 6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엄마 꿈을 꾸지. 동네 애들이랑 노는 꿈도 꾸고. 집이랑 동네 길거리까지 다 알겠는데, 이상하게 얼굴이 생각이 안 나. 엄마고 동생이고.”

만삭의 아내가 걱정되어서였는지 아버지는 동네 장정 중 가장 늦게 대동강을 건넜다. 그 탓에 이미 대동강 다리는 끊겨버리고 없었다. 열일곱 살 딸의 손을 잡고, 열 살배기 아들을 들쳐 업은 채 차디찬 대동강에 발을 내디뎠다. 차라리 더 추웠으면 강이 얼었을 텐데, 얼음이 둥둥 떠 있는 강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처자식을 건네주느라 몇 번이나 왕복하던 한 남자는 기력을 잃고선 하류로 떠내려갔다. 그런 그를 아무도 구해주지 못했다. 우선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 힘든 생사의 기로였다. 추우면 미친다는 말도 그때 처음 들었다. 얼굴에 웃음을 띤 채 강 아래로 사라져버린 사람도 몇이나 봤다.

그래도 살았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면 바늘로 찔러서 물을 빼곤 불로 지졌다. 몇 번 그렇게 하니 그의 발에도 굳은살이 박였다. 보기엔 흉했지만 걷기엔 편했다. 언제 집에 가냐며 떼를 쓰던 그였지만 그 굳은살처럼 점차 메말라갔다.

○ 두 번째 어머니


평양에 계신 어머니를 대신했던 건 부산까지 함께한 누나였다. 개성중학교 1학년 때 덜컥 야구를 시작했지만 누나가 없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매일 저녁 흙투성이가 된 유니폼을 깨끗하게 빨아 밤에 풀을 먹였고, 아침엔 빳빳하게 다림질까지 해 입혀 보낸 게 그의 누나였다. 혹시나 운동할 때 힘겨워할까 먹을거리에 한껏 신경을 써 준 사람도 누나뿐이었다. 없는 형편에 잔돈을 모으고 모아 그가 노래를 부르던 운동도구 펀치볼을 기꺼이 사다 준 것도 누나였다.

“솔직히 그땐 어렸으니까 고마운 것도 몰랐지 뭐.”

잠시 집을 나왔다 영영 엄마를 잃어버린 그에게 누나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동생처럼 덩치도 손도 큰 여장부였다. 말도 별로 없고 살갑지도 않았다. 그가 중고등학교 시절 경기에서 펄펄 날 때도 누나가 야구장을 찾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학을 다닐 때도, 국가대표 4번 타자로 이름을 날리던 실업야구 선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경기가 끝나거나 연습이 끝나고서 그가 항상 향하던 곳은 누나네 집이었다.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출가한 누나는 서울로 와서도 신당동의 아랫동네 윗동네에 살았다. 누나가 시집간 뒤 아버지가 곧 재혼을 했지만, 그는 늘 누나 곁을 맴돌았다. 그가 아버지나 새어머니에게는 두 조카가 귀여워서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정작 위로하고 싶었던 이는 자신이었다. 누님 곁에 있어야 그는 마음이 편했다.

1967년 6월 말이었다. 경기를 마치고 한일은행 야구부 사무실을 찾은 그를 누군가가 급하게 찾았다. 전화가 걸려왔으니 받아보라는 것이었다.

“누나가 지금 갔다.”

무슨 말인가 했다.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한 외삼촌은 벌써 전화를 끊은 뒤였다. 불과 며칠 전에도 집에서 봤던 누나였다. 셋째 딸을 낳고 산후조리를 잘 못했다는 얘길 듣긴 했었다. 그래도 멀쩡하던 사람이 금방 죽을 일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병원에 도착하고서야, 그리고 차갑게 식은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누나의 죽음은 현실이 됐다. 두 번째 어머니였던 누나와의 이별도 이렇듯 갑자기 찾아왔다.

“삼촌이 정말 비통해하시더라고요. 저희 어머니였지만, 삼촌에게도 어머니였으니까요.”

큰조카 유병훈 씨(56)의 기억처럼 김응룡은 그 큰 덩치로 한없이 울었다.

○ 기러기 아빠

늘 가족에 굶주려 했던 김응룡이 기러기 아빠의 원조라는 사실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열 살에 어머니의 품을 떠났고, 스물여섯에 두 번째 어머니인 누나를 떠나보낸 그 아니었던가. 아내 최은원 씨(71)와 두 딸 혜성(39·평택대 영상디자인학과 교수), 인성 씨(37·플루티스트)는 1990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큰딸이 고등학교 1학년, 작은딸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엄마와 함께이지만 어린 딸들이 이역만리서 살아가는데 왜 신경이 안 쓰였을까. 그는 매일 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무슨 공부를 하는지, 밥은 잘 먹는지같이 딱 한마디만 묻고 전화기를 놓았다.

아버지가 둘째의 플루트 부는 모습을 본 것은 5년 전 귀국독주회 때가 처음이었다. 한술 더 떠 큰딸의 작품전시회에는 2년 전에야 처음 발걸음을 했다. 본인의 야구경기를 지독히도 찾지 않았던 누나와 참 닮았다. 그는 북에 남겨진 가족 찾기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찾으면 한 60년 기러기 생활한 셈 치면 된다고 했다.

“이산가족 이야기할 때마다 내 얘기가 나왔는데 매번 똑같은 소릴 해. 이사 가서 모른다고. 그거 다 거짓말이야. 매번 그러는데, 우리 가족이 뭔가 잘못된 건 아닌가 싶어. 그래도 난 아직까지 기다려. 가족이잖아.”

희망은 점점 작아져 절망으로 변하려 하고 있다. 그래도 끈을 완전히 놓아버리기에는 그는 너무 그립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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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룡#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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