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富國强兵과 先軍정치

  • 입력 2009년 10월 6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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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국가, 실패국가, 혹은 ‘유격대’ 국가 등 국가체제로서의 평양정권을 부정 또는 수용하는 수식어는 많다. 김씨 일가가 권력을 세습하고도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굶어 죽어가는 수십만 백성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도 인민공화국이라 일컫고 있는 북한체제란 현대문명사회의 상식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나라, 바로 부조리 자체다 싶은 나라다.

하나 1945년 북한에 김씨 세습독재체제가 들어서기 이전 이미 또 다른 부조리 그 자체의 나라, 현대 문명사회의 상식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나라를 체험해 본 우리 세대에겐 다르다. 평양의 통치체제와 그 스타일은 우리에겐 아주 낯설지가 않고 괴이한 향수조차 불러일으키리만큼 데자뷔(예전에 익히 본 듯한) 세계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 빠져들어가 단말마의 증후군을 보인 덴노(天皇)제 군국주의 국가 일본이 그것이다.

북한체제에서 김일성 부자에 대한 우상화의 차원은 스탈린의 개인숭배, 나치의 총통숭배를 멀리 뛰어넘고 있다. 김일성은 위대한 영도자 지도자를 넘어 ‘민족의 태양’으로 자리매김되고 그 생일은 태양절로 축성되고 있다. 마치 패전 전 일본의 덴노를 아라히토가미(現人神·사람으로 나타난 하느님)로 모시고 그 생일을 천장절(天長節)이라 일컫던 것과 비슷하다.

김씨 일가 숭배, 천황제 닮은꼴

일제 치하에서 말이 나오는 대로 덴노란 말을 함부로 입에 올렸다가는 야단이 난다. 학교의 수업시간에도 그럴 경우 교사는 반드시 먼저 “차렷!” 구령으로 학생들 자세를 바로 세운 뒤 “황공하옵게도 덴노 헤이카(陛下·폐하)께서는…”이라고 한 다음 “열중 쉬엇!” 하고 얘기를 다시 계속했다. 과거 동유럽 공산국가의 북한대사가 주재국 외교부를 방문한 며칠 후 사색이 돼 다시 찾아왔다. 지난번 여기서 얼떨결에 김일성 수령의 얘기를 불손하게도 앉은 채로 했는데 그걸 절대 비밀에 부쳐두고 평양에는 알리지 말아 달라고 사정사정하더라는 것이다. 헝가리 공산당 국제국장 출신의 줄러 호른 전 외교장관이 회고록에 적은 얘기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국가의 고관에게도 기이하게 비친 이런 행태 역시 일제강점기를 체험한 우리에겐 익숙하기만 하다.

일제 말의 식량난과 배급제, 학교에서 공부하기보다 들에 나가 풀을 산더미처럼 베어 와선 오물을 퍼부어 퇴비를 만들고 그걸 운동장에 뿌려 밭을 일구어 고구마를 심던 나날, 책가방 대신 괭이를 들고 학교 대신 산에 가서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의 자살폭격기 연료로 공급한다는 송근유(松根油)를 얻기 위해 솔뿌리를 캐던 나날, 그러한 나날들이 아직 기억의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우리들에겐 오늘의 북한 실정이 낯설 수만은 없는 것이다.

지난 20세기의 역사는 세 명의 대원수(大元帥)를 내놓았다. 1945년 이전의 일본 쇼와(昭和) 덴노, 소련의 스탈린,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이다. 1945년 이전의 일본과 오늘의 북한과의 또 하나 유사점이다.

9월 4일 평양은 11년 만에 헌법을 개정해서 공산주의란 말을 버리고 그 대신 선군(先軍)사상을 주체사상과 짝을 이루는 북한 사회주의의 기본이념으로 선포했다고 보도되고 있다. 1945년 패망으로 가는 덴노 군국주의의 길에 북한이 빠져드는 것일까.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일본의 절대주의적 국가 목표가 식산흥업(殖産興業)과 함께 부국강병(富國强兵)이었다. 그러다 일본이 침략전쟁에 말려들수록 전자보다는 후자를 앞세우고 그중에서도 부국보다는 강병을 최우선시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원수가 군림하던 곳에선 어디서나 보아온 일반 사례다.

원래 부국강병이란 말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나온 말이다. 나라를 부하게 하려면 땅을 넓히는 데 힘쓰고 병사를 강하게 하려면 그 백성을 부하게 하는 데 힘써야 한다(欲富國者 務廣其地, 欲强兵者 務富其民)는 주책(奏策)이 그것이다. 강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선 오히려 백성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선군’ 아닌 ‘선민(先民)’ 사상이 그 바탕이라고 볼 수 있겠다.

선군-부국보다 선민-부민 급해

그런데도 20세기에 등장한 ‘대원수’의 절대주의 체제는 ‘부민’보다는 ‘부국’을, ‘부국’보다는 ‘강병’을, 혹은 ‘선민’보다는 ‘선군’에 몰입하면서 멸망의 길에 들어섰다. 쇼와 덴노의 일본 ‘강병’국가는 메이지유신 이후 77년 만에 패망했고 세계 최강의 핵무장 국가 소련은 볼셰비키혁명 이후 73년 만에 멸망했다. 북한의 ‘선군’정치 체제에도 70년이면 명줄이 다하는 불안한 미래가 가까워오고 있다. 살아남는 길은? 대외개방과 내부개혁으로 활로를 개척한 중국과 헝가리 공산당이 이미 훌륭한 시범을 보여주었다.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통 큰 결단을 이런 때야말로 한번 기대해봄 직하지 않을까.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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