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깨치니 사는게 신나” 81세에 배움의 한을 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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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학습축제 백일장 가슴에 쌓인 만학의 사연

뒤늦게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들이 백일장에서 또박또박 글을 쓰고 있다. 9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해오름 백일장’의 모습.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뒤늦게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들이 백일장에서 또박또박 글을 쓰고 있다. 9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해오름 백일장’의 모습.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이 세상에 하나뿐인 아들이 군대에 갔는데도 글을 몰라 편지 한 장 못 보낸 어미의 심정. 지금 같으면 매일이라도 편지를 쓸 수 있을 텐데….”(한별례·70)

“아이들이 어릴 적에 내게 숙제를 물어봐도 멍하니 있었다. 열심히 글을 배워 손자 손녀에게 동화책을 읽어줄 수 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원부용·64)

서울 평생학습축제가 열린 9일 서울 여의도공원. 할머니들이 연필로 꾹꾹 눌러가며 글을 써내려갔다. 평균 연령 70세. ‘해오름 백일장’에 참가한 늦깎이 학생들. 행사를 주최한 서울시교육청은 두 가지 주제를 냈다. ‘배우는 즐거움’과 ‘나는 학생이에요’.

서울 중랑구 면목초등학교에서 늦깎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순현 교사(54·여)는 일흔 살 고순임 할머니가 써내려가는 글을 어깨 너머로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큰딸이 책을 갖고 와서 엄마 이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나는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갔다. 나중에 아빠한테 물어보라고 말했다. 얼마 뒤 이번에는 딸아이가 시험을 본다며 문제를 갖고 와서 물었다. 할 수 없이 엄마는 학교를 안 다녀서 글을 모른다고 말해줬다. 그때 딸하고 둘이서 한참이나 울었다.’

‘해오름 백일장’ 참가자인 81세 이현숙 할머니가 쓴 글.
‘해오름 백일장’ 참가자인 81세 이현숙 할머니가 쓴 글.
할머니는 큰딸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의 이야기를 또박또박 썼다. 스물두 살 때 전북 정읍에서 서울로 온 뒤 학교를 다니지 못한 사실을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는 생활이 어려워도 가사도우미 일마저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소개업소 직원이 적어준 주소를 읽지 못하니 집을 찾는 데 너무나 오래 걸려서. 딸 다섯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글을 모르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자신은 못 배웠지만 둘은 고등학교, 셋은 대학까지 보냈다. 글을 모른다고 고백하고 붙들고 울었던 큰딸이 이제 마흔여섯 살. 이 딸이 알려줘서 올해부터 한글을 가르쳐주는 문해교실을 다니게 됐다.

고 할머니는 “대회에 나와 보니 나만 못 배운 것이 아니구나 싶어 용기가 난다. 초등학교를 마치면 중학교 과정도 배우고 싶다”며 환하게 웃었다. 올해 여든한 살인 이현숙 할머니는 ‘어느덧 세월은 흘러 노인이 됐다. 이제라도 공부를 하고 싶었다. 우리나라에 살면서 한글도 쓰지 못했다. 81세 노인이 아동으로 변해 여덟 살이 된 것 같다’고 썼다. 할머니는 집안이 어려워 공부는 꿈도 못 꾸다가 열네 살 때 광복을 맞았다. 이제는 하루하루가 신이 난다. 할머니는 “편하게 있으면 더 늙을 것 같다.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아주 즐겁다. 영어는 아직 대문자 소문자 알파벳밖에 못 배웠는데 얼른 속뜻을 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백일장에 참가한 만학도 320명 중에서 48명은 태어나 처음으로 상장을 받았다. 김양옥 서울시교육청 평생진로교육국장은 “서울에서는 1500명 정도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30개 기관(학교 15곳 포함)에서 정식 학력으로 인정되는 문해교육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평생학습축제 백일장#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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