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저 쏘면 뇌신경 ‘ON’… 빛으로 동물행동 제어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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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의 혁명 ‘光유전학’ 주목

광유전학 실험실의 모습. 오른쪽 사진은 뇌세포 속 물질을 조작하기 위해 쥐에게 빛을 비추고 있는 모습이다. 뇌에 빛을 비추면 세포 및 조직의 활성을 조절하고 관찰할 수 있다. 위키피디아·셀 제공
광유전학 실험실의 모습. 오른쪽 사진은 뇌세포 속 물질을 조작하기 위해 쥐에게 빛을 비추고 있는 모습이다. 뇌에 빛을 비추면 세포 및 조직의 활성을 조절하고 관찰할 수 있다. 위키피디아·셀 제공
이달 21∼25일 대구에서는 뇌 과학자들의 올림픽으로 불리는 세계뇌신경과학총회(IBRO 2019)가 열렸다. 전 세계에서 뇌 전문가 4400명이 참석한 이번 대회에서는 정신질환, 신경윤리학, 뇌질환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연구 결과들이 소개됐다. 이 중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은 분야는 뇌 연구와 생명과학의 혁명을 가져왔다고 평가받는 ‘광(光)유전학’이다.

‘빛의 학문’인 광학과 유전학의 합성어인 광유전학은 빛으로 세포 속 물질을 마음대로 조작해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보는 기술이다. 세포에 빛을 비추면 열렸다 닫히는 스위치를 만들어 세포 및 조직의 활성을 조절하고 관찰하는 원리다. 이 방식을 활용하면 살아 있는 세포의 기능을 훨씬 쉽게 알아낼 수 있다.

광유전학은 생명과학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살아 있는 동물의 뇌 활동을 실시간으로 관찰하고 필요하면 조작할 수 있어 뇌 상태를 살펴보기만 하던 기존 연구방식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특히 빛으로 뇌세포 속 물질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특징 때문에 광유전학은 우울증, 알츠하이머병 등 다양한 정신질환 치료를 위한 핵심 기술로도 부상했다. 부작용이 적은 정신질환 치료법을 개발하기 위해선 뇌와 관련한 신경세포의 정확한 기능 규명이 필수적인데 광유전학은 신경세포를 선택적으로 작동시켜 새롭게 신경세포를 정의하고 작동 원리를 규명하는 데 활용된다.

세계 뇌과학계가 차세대 주자로 꼽는 하일란 후 중국 저장대 의대 교수는 지난해 광유전학을 이용해 동물 마취제로 쓰이는 케타민이 우울증을 치료하는 과정을 밝혀냈다. 케타민은 마약으로 악용될 정도로 우울감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케타민이 어떤 작용을 통해 우울증에 효과가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후 교수는 광유전학 기술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뇌를 관찰하며 케타민이 뇌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봤다. 그 결과 케타민은 기쁨을 잘 느끼지 못하게 하는 뇌 부위인 ‘외측고삐핵’의 활동을 억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뇌의 시상상부에 위치한 외측고삐핵이 우울증 환자의 뇌에서 비정상적으로 과도하게 활성화된다는 연구 결과는 있었지만 케타민과 외측고삐핵 간의 관계가 밝혀진 건 처음이다. 광유전학이 케타민과 외측고삐핵 간의 중간 퍼즐을 맞춘 것이다.

이런 연구 결과를 기반으로 올 3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케타민 유사 약물을 우울증 치료제로 승인했다. 케타민을 우울증 치료제로 사용할 경우 즉각적인 효과와 동시에 일주일 이상의 지속성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 우울증 치료제는 75% 정도의 환자에게만 효과가 있고 그 치료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약 2주에서 3주로 긴 편이다.

크리스틴 데니 미 컬럼비아대 교수팀은 2017년 광유전학 기술을 이용해 알츠하이머병 치료법의 실마리를 찾았다. 광유전학 기술을 이용해 알츠하이머 질환 모델 쥐의 뇌 신경세포에 레이저를 가했더니 기억이 복원된 것이다. 알츠하이머병은 신경세포 안팎의 노폐물 단백질이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신경세포를 파괴해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광유전학은 알츠하이머 질환의 기억 장애가 기억 저장의 문제가 아니라 저장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이런 이유로 광유전학은 생명과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유력한 노벨생리학상 후보로 꼽히고 있다. 1991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에르빈 네어 독일 막스플랑크 생물물리화학연구소 명예교수는 가장 유력한 올해 노벨생리의학상 수상 후보로 광유전학을 꼽았다. 글로벌 학술데이터 분석기업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도 25일 올해 유력한 노벨과학상 수상 후보를 공개하면서 광유전학 발전에 기여한 칼 다이서로스 미 스탠퍼드대 교수와 에른스트 밤베르크 독일 막스플랑크 생물물리학연구소 명예소장, 게로 미젠뵈크 영국 옥스퍼드대 생리학과 교수의 수상을 점쳤다.

광유전학 국내 전문가인 허원도 기초과학연구원(IBS) 인지및사회성연구단 그룹리더(KAIST 생명과학과 교수)는 “다이서로스 교수 외에도 에드워드 보이든 미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 등 광유전학 기술을 선도한 연구자들의 수상이 예상된다”며 “광유전학은 부작용도 많고 정확하게 신경세포를 자극할 수 없었던 기존 뇌과학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광유전학 연구는 국내에서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허 교수 연구팀은 수술 없이 뇌에 빛만 비추는 방법으로 동물의 뇌 유전자를 켜고 끄는 기술을 개발했다. 평소에는 단백질이 기능을 하지 않고 있다가 빛을 비추면 마치 스위치를 켠 것처럼 작동하는 원리다. 스마트폰 손전등이나 레이저 포인터로 켜고 끈다. 허 교수는 “광유전학을 이용하려면 지금까지는 수술을 통해 실험동물의 뇌에 광섬유를 심어야 했다”며 “수술을 하지 않고 세포에 빛만 비춰도 유전자를 작동시킬 수 있어 광유전학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말했다.

고재원 동아사이언스 기자 jawon1212@donga.com
#광유전학#뇌신경#세계뇌신경과학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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