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대… 연극이 사는 길은 삶을 바꿀만한 경험 주는 것”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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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887’의 배우이자 연출 로베르 르파주 내한

1인극 ‘887’에서 로베르 르파주가 어렸을 적 머물며 다양한 기억을 간직한 887번지 아파트 앞에 선 장면. 그는 “실제로는 길 건너편에 살던 사람인데 극의 구성을 위해 아파트에 사는 인물로 표현하는 등 상상력을 발휘했다”고 설명했다. LG아트센터 제공
1인극 ‘887’에서 로베르 르파주가 어렸을 적 머물며 다양한 기억을 간직한 887번지 아파트 앞에 선 장면. 그는 “실제로는 길 건너편에 살던 사람인데 극의 구성을 위해 아파트에 사는 인물로 표현하는 등 상상력을 발휘했다”고 설명했다. LG아트센터 제공
“저는 e메일 보내는 것조차 서툴 정도로 과학기술에 무지한 사람입니다. 다만 연극무대가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늘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을 뿐이죠.”

공연 때마다 ‘르파주 열풍’을 불러일으킨 로베르 르파주(62)가 배우이자 연출로 참여한 연극 ‘887’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는 태양의 서커스 ‘카(KA)’,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에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이미지, 영상, 무대장치를 폭넓게 활용하며 ‘현대 연극의 혁신가’로 평가받는다. ‘기계 장치’라는 뜻의 창작집단 ‘엑스 마키나’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27일 서울 중구 주한 캐나다대사관에서 만난 그는 과학기술을 연구해 혁신적으로 무대에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묻자 뜻밖의 답을 내놨다.

“놀라시겠지만 저는 따로 과학기술을 공부해 본 적이 없어요, 하하. 다만 젊은 제작진들과 새로 나온 기술, 애플리케이션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하면서 신기술을 무대로 가져올 방법을 고민할 뿐입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르파주는 머릿속 기억을 끄집어내듯 디테일한 장치로 무대를 꾸몄다. 그는 “시시각각 변하고 움직이는 무대 위의 아파트, 뇌의 이미지, 옛날 사진, 그림자 효과 등을 사용했다”며 “특히 미니어처를 활용한 고급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단순한 인형극처럼 보이도록 만든 점이 포인트”라고 설명했다.

로베르 르파주는 “연극은 무엇보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언어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LG아트센터 제공
로베르 르파주는 “연극은 무엇보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언어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LG아트센터 제공
그는 이번 작품에서 “개인의 기억에서 비롯된 사회적 기억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극은 르파주가 캐나다 퀘벡에서 열리는 ‘시의 밤’ 40주년 행사에 초청받아 시를 낭송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3쪽 분량의 시가 외워지지 않자 그는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익숙한 장소에 외워야 할 내용을 배치해 재조합하는 기억법을 활용한다. 극의 제목 ‘887’은 그가 살던 ‘퀘벡 시티 머리가 887번지’에서 따왔다. 시를 외우면서 그는 자연스레 1960, 70년대 가족과 이웃에 관한 기억을 떠올린다.

자전적 이야기는 사회적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간다. 르파주는 “현재 기억에 비해 또렷한 어린시절의 이야기(history)에서 시작해 대문자 ‘H’로 시작하는 캐나다의 역사(History)까지 짚고 싶었다”며 “계급적 갈등과 마찰이 끊이지 않았던 캐나다 퀘벡의 아픈 모습을 극에 담았다”고 덧붙였다. 작품은 한국과 무관한 이역만리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는 “잘못을 잊고 기억을 잊은 듯 살아가는 이 시대의 한국, 세계 관객에게 기억에 대한 이야기는 중요한 시사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르파주는 연극이 당면한 위기에 대해서도 말했다. 넷플릭스 등 새로운 매체에 맞서 연극이 살아 있는 예술이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무용, 춤, 음악, 문학 등 여러 예술 형태를 품고 있는 연극은 ‘모태 예술(Mother Art)’로서 타 장르처럼 다채로운 스토리텔링을 고민하고 변화해야 합니다. 집에서 쉽게 보는 넷플릭스와 비교해 차별화하려면 연극은 삶을 송두리째 바꿀 경험을 제공해야겠죠.”

29일부터 6월 2일까지. 서울 강남구 LG아트센터. 4만∼8만 원. 8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로베르 르파주#연극 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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