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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도 길다… A4용지 1장짜리 초단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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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도 길다… A4용지 1장짜리 초단편 시대

김지영 기자 입력 2014-11-29 03:00수정 2014-11-29 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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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획]문단에 부는 짧은 글 바람
최근 영국에서 ‘성인 남성을 울게 만드는 시(Poems that make Grown Men Cry)’라는 모음집이 화제를 모았다. 기자이자 전기 작가인 앤서니 홀던이 편집한 이 책은 발간 첫 주에 5600부가 팔렸다. 뉴스위크는 “시 모음집이 거의 팔리지 않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 시 모음집의 반응은 기록적”이라고 평했다.

영국 슈퍼마켓 체인인 ‘웨이트로즈’의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83%가 시를 사랑하거나 시에 흥미가 있다고 답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페이스북 사용자 중 190만 명이 자신의 계정 화면에 유명 시인의 시를 올린 것으로 조사됐다. 영국 BBC의 황금 시청률 시간대인 금요일 밤에 방영된 드라마 ‘이탈리아 여행(The Trip to Italy)’에서는 영국의 인기 배우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던이 낭만파 시들을 자주 인용해 색다른 감성을 전달했다. 방영 다음 날엔 이들의 대사가 많은 시청자의 입에 오르내렸다. 마이클 트림블 런던대 교수는 “시는 음악적 리듬감을 통해 인간의 정서에 호소한다. 이는 시각적 예술이나 강단 위의 우렁찬 연설보다도 호소력이 있다”고 분석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요즘 시의 ‘파괴력’을 곧바로 업무에 활용한다. 비누 제조사 도브는 대중과 교감하는 광고 문구를 제작하기 위해 시인을 고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런던교통국도 시민과의 소통에 시인을 등장시킨다.

짧은 분량의 문학 장르인 시와 단문 메시지는 SNS의 유행으로 폭발력을 얻었다. 시와 단문은 산문 장르에도 지배력을 뻗치고 있다. 단편소설보다 더 짧은 ‘플래시 픽션’도 그런 흐름 속에 번창하고 있다. 이러다간 산문 장르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전통 산문 작가들에겐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전통’ SNS의 위세가 정보기술(IT) 강국에서 한풀 꺾이고 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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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아지는 문학… 시에 대한 열광

‘당신의 꿈이 시들어가고 있다는 첫 번째 징후는 당신이 이런 말을 내뱉기 시작할 때 나타납니다. “지금은 내가 너무 바빠서….”’

브라질 출신의 베스트셀러 소설가 파울루 코엘류가 쓴 ‘마법의 순간’의 한 대목이다. 국내에서 출간 1년이 지난 지금까지 10만 부 이상 팔렸다. ‘…순간’이라는 제목에서 짐작되듯 이 책은 코엘류의 트위터 글을 엮어서 만든 책이다. 코엘류는 장편 소설을 쓰면서도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글을 올리는 작가다. 그의 트위터 팔로어는 지금 730만 명에 이른다.

그의 글은 산문과 운문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메시지가 강렬하다.

브라질 소설가 파울루 코엘류의 트위터. 작가는 ‘당신이 기다려온 마법의 순간은 바로 오늘입니다’ ‘키스할 때는 천천히, 웃을 때는 마치 정신이 나간 것처럼’ 등 짧지만 강렬한 글을 올렸다. 그가 펴낸 ‘마법의 순간’은 짧은 글 모음집이다. 파울루 코엘류 트위터
‘오랜 세월 숱한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시간들을 제물로 바치고 나서야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에 대한 신뢰라는 걸 말이지요.’ ‘신이시여, 우리를 눈뜨게 하소서. 인생에서 그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새로운 문예와 문화조류를 소개해 온 미국 잡지 애틀랜틱은 ‘플래시 픽션’이라는 새로운 소설 장르에 주목하고 있다. 잡지는 올 6월 출간된 단편 작가 스튜어트 다이벡의 소설집 ‘열광하는 공모(Ecstatic Cahoots)’를 소개했다. 이 책에 실린 소설은 모두 50편. 같은 시기 다이벡이 펴낸 단편집 ‘종이 손전등(Paper Lantern)’에 실린 작품이 9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열광하는 공모’에 실린 이야기들의 분량이 얼마나 짧은지 짐작할 수 있다.

플래시 픽션은 단편소설 중에서도 극히 짧은 단편을 가리킨다. 단편소설이 일반적으로 원고지 70∼150장 분량인 데 비해 플래시 픽션은 A4 용지 1장 안팎 정도다. 플래시 픽션은 분량의 제한 때문에 기승전결의 전통적인 서사구조를 갖추기 어렵지만 의미를 압축적으로 담아낸다는 특징이 있다. 의미의 함축은 시 장르의 특징인데 플래시 픽션은 시와 달리 어느 정도의 스토리를 갖췄기 때문에 재미를 전달한다는 장점도 있다.

애틀랜틱은 “그간 힙합이나 랩이 시의 역할을 대신해 왔다”고 돌아보면서 그동안 미국 문화에서 잊혀졌던 시의 감수성이 플래시 픽션을 통해 새롭게 전달되고 있다고 조명했다. 찰나의 감동을 던져주고 현상에 다양한 해석을 끌어내는 시의 특성은 플래시 픽션에 그대로 담겨 있다.

이런 작품은 여태껏 ‘비주류’였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가 출간되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미국인 상담가인 잭 켄필드가 펴낸 이 책은 두세 쪽 분량의 짧은 이야기 100여 편을 모은 것이다. 책에는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의 에피소드 등 인생의 의미와 철학이 담긴 우화 등이 실렸다. 이 책의 원고를 본 미국의 대형 출판사들은 “아무도 이렇게 짧은 이야기들을 읽지 않을 것”이라며 출판을 거절했다. 그러나 이 책은 출간된 이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고 출간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꾸준하게 판매되고 있다. 그야말로 짧은 이야기의 위력을 보여준다.

단편 작가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 앨리스 먼로. 동아일보DB
이런 흐름에서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의 작품도 새로 봐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먼로는 장편소설 한 권을 제외하고 ‘행복한 그림자의 춤’ ‘디어 라이프’ 등 지금껏 단편집 12권을 낸, 일생을 단편 창작에 매진해 온 소설가다. 그는 단편 작가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먼로는 솔 벨로 이후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캐나다 작가다. 먼로의 수상은 그가 여성이라는 것, 그간 노벨문학상이 주목하지 않았던 캐나다 작가라는 사실 이외에도 1944년부터 수여된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 최초의 단편소설 작가라는 점에 세계 문학계가 주목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장폴 사르트르의 ‘구토’,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등 지난 세기의 걸작들에 비추어 ‘소설=장편’이었음을 상기하면 단편작가 먼로에 대한 조명은 새삼스럽게 느껴질 만하다.

애틀랜틱은 최근 ‘짧은 이야기라고 해서 작은 이야기는 아니다(Short stories aren't small stories)’라는 제목으로 먼로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면서 더욱 짧아진 소설의 문학적 의미를 되짚었다.

“먼로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그의 단편을 가리키는) ‘작다(small)’라는 단어가 더불어 쏟아져 나왔다. (…) 그러나 부엌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 역시 궁전이나 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거대한 행진의 일부를 차지한다.”

속도 사회가 빚은 단문의 물결

지금의 ‘짧은 글’은 SNS의 위세와 맞물려 있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카카오톡 같은 무료 문자메시지 서비스, 글자 수 140자로 제한된 트위터 등 단문 스타일의 유행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단문 소통에 익숙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사랑과 연애에 관한 발랄한 강의로 유튜브 공간을 사로잡는 김지윤 좋은연애연구소장. 그는 ‘신도림 영숙이’ 동영상에서 단문에 익숙한 젊은 세대의 소통법에 주목하며 대학교 2학년 사촌동생의 예를 들었다. 그의 사촌동생 또래들은 어렸을 때부터 단문 메시지에 익숙해 있다.

“이들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커피잔 그림 하나에 댓글이 75개가 달렸다. 너무 궁금해서 들어가 봤다. 도대체 무슨 커피이기에 댓글이 그렇게 많이 달렸나 해서. 댓글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댓글이 다 이런 거다. ㅋㅋㅋ, ㅍㅎㅎ, 아웅, 뿌잉, 낑. 제대로 된 문장도 별로 없고 제대로 된 의성어도 별로 없었다. 7명의 친구가 10개 정도씩 댓글을 쓰면서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건 그들의 75개의 댓글이 소통하고 있었다는 거다. 재미있어 하고, 즐거워하고, 정말 같이 그 커피를 먹고 싶어 한다는 게 느껴졌다.”

지금 세대는 이른바 ‘스압’(스크롤 압박)을 느끼는 만큼 짧은 글로 소통하는 데 익숙하다. 아마존 킨들 단말기의 배터리 수명이 1주일 이상 가는 데 반해 아이패드의 배터리 사용시간이 10시간 정도로 비교되자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은 10시간 이상 연속으로 책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며 짧은 글쓰기 세대를 두둔했다.

빠르게 소비되는 짧은 글들 중에서도 옥석은 가려진다. 신문과 잡지에 원고지 3∼5장 정도의 짧은 글을 지속적으로 연재해 온 시인 오은 씨는 “짧은 글 중에서도 알짜 정보가 압축돼 있거나 심금을 울리는 문장이 있는 글이 주목받는다”고 말한다. 그는 “쓰다 보면 문장 하나가 모자라거나 넘치는 때가 많다. 그렇게 글을 쓸 때의 호흡을 조절하는 게 쉽지 않다”며 ‘짧은 글 쓰기’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분량이 적으니 상대적으로 쓰기가 쉬우리라는 통념을 뒤집는 얘기다. 그는 “그(짧은 글) 안에서 앎이든 정보든 감동이든 뭐든 주면서 나를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글쓰기는 항상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일각에선 삶의 시스템이 바뀌었기 때문에 글쓰기 스타일이 변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김수영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는 “삶의 구조가 속도 사회로 변화하면서 소비 패턴도, 삶의 호흡도 그에 맞춰지는 것”이라며 “긴 호흡을 하려면 시간을 확보해야 하는데 우리가 몸담은 속도 사회는 느리고 긴 성찰을 할 만한 시간을 가질 수 없다”고 밝혔다.

시인 안현미 씨도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개야만 ‘현대인임’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라며 “현대인은 넘쳐나는 정보와 콘텐츠와 트렌드의 무한 미로 속에서 어제는 웰빙, 오늘은 힐링, 내일은 멘붕의 날들을 살아내고 있다”고 말했다. 안 씨는 “그 숨쉴 틈 없는 ‘틈’에서 짧은 시, 짧은 글의 소나기 같은 위로를 찾는 게 아닐까 싶다”고 덧붙였다. ‘성인 남성을 울게 만드는 시’의 편집자 앤서니 홀던은 “시 한 편은 30초면 읽는다. 그러나 잔상은 오래간다”고 말했다. 현대인은 ‘30초 만에 읽을 수 있고 잔상은 오래가는’ 글에 목말라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단편#초단편#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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