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용득의 사는게 코미디]〈3〉어느 파렴치한 독재자의 고백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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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 만화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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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 만화가
권용득 만화가
아이는 내가 자기를 호되게 꾸짖은 순간을 일일이 기억한다.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여섯 살 때 아빠가 나 무릎 꿇리고 무거운 책 들게 했잖아.” “일곱 살 때 아빠가 내 손바닥을 플라스틱 자로 때렸잖아.” 하필 이런 얘기는 자기를 최고로 아끼는 할머니 앞에서만 기다렸다는 듯 나온다. 그럼 나는 이문열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독재자 엄석대가 되고 만다. 곧이어 할머니는 엄석대를 사정없이 조지고, 아이는 그제야 희미하게 웃는다.

아이에게 들게 한 ‘무거운 책’은 본문 40쪽짜리 동화책(약 400g)이었다. 플라스틱 자로 손바닥을 때린 것도 훈육 차원이었다. 아이는 앙금이 남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이는 사실 할머니에게 내 모든 만행을 고발하지 않았다. 홧김에 손바닥으로 아이 엉덩이와 등짝을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때린 적이 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아이는 그것만큼은 할머니에게 아직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이는 그처럼 내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순간을 기억에서 아예 지워 버리고 싶은 게 아닐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나를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보다 괴로운 일은 없을 테고, 그 손찌검은 훈육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훈육 차원의 체벌은 괜찮다는 얘기가 아니다. 돌이켜보면 체벌이든 손찌검이든 결국 아이를 손쉽게 통제하려는 의도였다.

마침 정부는 ‘포용국가 아동정책’의 일환으로 그동안 법정에서 아동에 대한 친권자의 체벌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곧잘 인용됐던 민법 915조를 개정하기로 했다. 민법 915조는 ‘친권자는 그 자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하여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고 법원의 허가를 얻어 감화 또는 교정기관에 위탁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훈육과 학대의 경계가 모호한 친권자의 체벌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고 아동의 법적 지위를 강화하자는 취지인데, 여론조사에서는 상황에 따라 체벌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70% 가까이 된다.

2010년 무렵에도 서울시교육청이 관할 유치원과 초중고교의 체벌을 전면 금지하자 일선 교사뿐 아니라 학부모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서울시교육청의 체벌금지령은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지적은 물론이고 체벌이 금지되면 면학 분위기를 해치고 교권마저 무너진다는 걱정까지 있었다. 게다가 몇몇 학생은 화장실 청소 같은 징계보다 차라리 한 대 맞는 게 낫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학창 시절 ‘사랑의 매’를 있는 힘껏 휘두르던 교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고, 학생은 적어도 사랑의 매를 통해 서로의 맷집을 경쟁할 일이 없다.

아이는 손찌검 사건 후 내 눈치를 주의 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그러지 말라며 할머니에게조차 말 못할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라고 약속했지만, 말뿐인 약속 따위로 아이의 트라우마를 바로잡을 수는 없는 듯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이가 한때 체벌의 도구로 동원했던 동화책을 여전히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플라스틱 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아이는 탄핵돼 마땅한 독재자에게 개과천선할 기회를 준 셈이다.
 
권용득 만화가
#육아#체벌#포용국가 아동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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