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 X파일]정전이라니?! 몇달 걸렸던 계산 통째로 날아갔다

  • 입력 2007년 8월 24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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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전기가 나갔다. 순간 내 심장도 멎는 것 같았다. 전기가 다시 들어오기까지 불과 3, 4초의 시간이 3, 4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다른 연구실에서 실험 장비를 여러 대 가동시키는 바람에 과부하가 걸려 일시적으로 전기 공급이 중단된 것이다.

컴퓨터의 전원을 다시 켰다.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였다. 몇 달간 작업한 결과를 토대로 1주일 넘게 머리를 싸매고 밥 먹고 잠잘 시간까지 아껴 가며 매달렸던 계산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

수억 원짜리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불과 몇 초의 정전 때문에 백지 상태로 변한 것이다. 최근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정전 사태를 겪은 담당자의 심정이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늘이 노랗게 변했고, 정말 울고 싶었다.

업체와 약속한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맞추기란 어림도 없었다. 다들 어렵다고 맡지 말라고 말리던 프로젝트를 내가 왜 굳이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는지 후회막급이었다. 어쨌든 업체에 양해를 구하고 처음부터 다시 계산을 시작해야 했다.

1980년대 후반의 일이지만 그때의 절망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상황이다. 일반적인 문서작성 프로그램도 임시저장 기능을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당시 우리 연구팀은 디지털 설계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었다. 각종 기계부품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작은 불량이라도 생기면 기업은 많게는 수십억 원의 손실을 입을 수 있다.

디지털 설계 프로그램은 부품 설계의 전 과정을 먼저 컴퓨터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구현해 보고 불량 원인을 미리 알아내기 위한 것이다.

엔지니어들에게 프로그램의 작동법을 교육할 때도 적잖게 당황한 적이 있었다. 교육 직전 프로그램 화면에 갑자기 해괴한 오류가 뜬 것이다. 연구실에서는 잘만 돌아가던 프로그램이…. 식은땀이 흘렀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엔지니어들을 되돌려 보낼 수도 없는 노릇. 우리 기술에 대한 신뢰도가 걸린 문제였다.

할 수 없이 수천 줄에 이르는 복잡한 프로그램에서 변수 하나하나를 일일이 확인하며 오류를 찾아내야 했다. 이거야 짚더미 속에서 바늘 찾는 격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우리 프로그램은 어떤 부품을 설계하든지 한 시간이면 계산이 끝날 정도로 업그레이드됐다. 계산을 중단했다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정전에도 끄떡없다.

기술이 실용화되는 길은 멀고 험하다. 현재 우리 산업을 이끄는 첨단기술들은 현장에서 쓰이기 전까지 시행착오를 수없이 겪었다. 후배 연구자들에게 ‘시행착오로 잃어버린 시간은 빨리 잊으라’고 말하고 싶다. 절망에만 빠져 있으면 영영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까.

최정길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디지털설계센터장 cjk@kitech.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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