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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협상을 역사전쟁 도구로 삼지 말라[오늘과 내일/정연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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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협상을 역사전쟁 도구로 삼지 말라[오늘과 내일/정연욱]

정연욱 논설위원 입력 2019-07-23 03:00수정 2019-07-2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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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불문율은 ‘불가근, 불가원’… 외교협상에선 친일프레임 걷어내야
정연욱 논설위원
정치권에선 한일관계의 불문율이 있다. 일본에 너무 가까이 가지도,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말라. 한마디로 ‘불가근, 불가원’이다.

포털사이트 댓글조작 혐의로 기소된 ‘드루킹’ 김동원은 10일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지난해 초 만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외교가 우려스러워 일본과 대화하고 싶지만 친일파로 몰리는 게 두렵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전했다. 드루킹의 진술대로라면 안희정도 한일관계의 독특한 불문율을 거론한 것이다. 한일 갈등이 정치권으로 건너오기만 하면 미래 비전의 큰 그림은 사라지고 ‘친일파’ 낙인찍기가 횡행했다. 정치인에게 친일파 딱지는 ‘빨갱이’만큼 강렬한 ‘주홍글씨’다.

오구라 기조(小倉紀藏) 교토대 교수. 1980년대 말 서울대 철학과에서 8년간 한국적 정신세계의 이면을 파헤친 그의 분석은 도덕철학,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자·성리학이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데 맞춰졌다.

“일본인은 사적 욕망이 공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오해했고, 한국인은 사적인 욕망을 공적인 도덕으로 가리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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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도덕의 잣대로 재단하는 도덕 지향성 국가인데, 잣대가 되는 도덕은 요즘 언어로는 정의에 가까울 것이다. 오죽하면 전두환 군부 정권의 국정목표도 ‘정의사회 구현’이었을까. 도덕을 중시하는 한국, 현실을 중시하는 일본. 서로 평행선을 달리니 우리 사회에선 한일 갈등에 관한 한 표현의 자유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여기서 친일-반일 프레임은 선악 구도로 굳어졌고, 중간지대를 허용하지 않았다.

한일 갈등 관련 화살이 문재인 정부를 향하면 ‘신(新)친일’ ‘이적(利敵)’ 등 낙인찍기에 나선 청와대 참모와 집권여당 중진들이 친일 프레임의 이런 위력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지금 여권은 7년 전 이명박 정권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당시 이명박의 독도 방문으로 한일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자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깜짝쇼이자 나쁜 통치행위” “반일 감정에 편승 말라”고 비난했다. 대일 강경 드라이브에 이명박 지지율은 한때 80%까지 치솟았다. 지금의 여야가 자리만 바뀐 듯하다.

한국처럼 반일정서가 강한 중국은 1972년 9월 일본과 전격적으로 수교를 맺었다. 중국 지도부는 협상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일본에 배상청구를 포기한 ‘파격’의 배경을 설명했다.

“청나라는 (청일전쟁 패배로) 2억5000만 냥을 일본에 배상했다. 이 때문에 청조는 세금을 무겁게 부과했다. 이는 당시 일본 국가예산의 절반에 달하는 규모로서 민중이 고통을 겪었다. 전쟁 책임은 일부의 군국주의 세력에 있으며 대세인 일본 국민과 구별해야 하므로 이들에게, 그리고 차세대에게 청구권의 고통을 부과하고 싶지 않다.”

일본의 외교적 승리로 볼 수도 있겠지만 중국이 ‘통 큰 양보’로 대국의 면모를 보여줬다는 평가도 적지 않았다. 수교를 통해 중국은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견제하면서 일본으로부터 장기적으로 대규모 국제협력개발원조(ODA)를 이끌어내는 외교적 실익을 거뒀다.

물론 각 나라의 사정은 다르다. 일본의 잘못된 수출 규제 조치 등은 계속 문제를 삼으면서 그 부당성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 그렇다고 한일 외교협상을 무작정 방치할 순 없다. 외교협상은 선악과 도덕의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그래서 타협의 정치력이 필수적이다. 외교협상에서 다룰 미래 비전과 통상 현안은 친일-반일 두 개의 그릇에 담을 수 없다. 친일 프레임을 뛰어넘을 냉철한 현실 인식이 절실하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한일관계#반일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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