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혼혈여인의 예술혼, 피와 땅의 경계 허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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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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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투아니아 여인/이문열 지음/276쪽·1만1500원·민음사

뮤지컬 음악 감독 박칼린 씨를 모델로 한 소설 ‘리투아니아 여인’을 펴낸 소설가 이문열 씨. 민음사 제공
뮤지컬 음악 감독 박칼린 씨를 모델로 한 소설 ‘리투아니아 여인’을 펴낸 소설가 이문열 씨. 민음사 제공
김혜련은 이런 여자다.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외모는 이국적이지만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기에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중년의 나이에 한국에서 뮤지컬 음악 감독으로 성공한 인물. 그렇다. 그녀의 실제 모델은 박칼린(44)이다.

민음사 제공
민음사 제공
이문열과 박칼린은 뮤지컬 ‘명성황후’에서 원작자와 음악 감독으로 함께 일한 적이 있다. 현실과 소설을 혼동하기 쉬운 상황에 대해 이문열은 ‘작가의 말’에서 분명히 선을 긋는다.

“1993년 늦겨울 뉴욕의 어느 호텔에서였다. 어릴 적 한국에서 자랐던 그녀가 한국 아이들의 따돌림을 받아 미국으로 가거나, 리투아니아를 빠져나와 미국에 찾아온 그녀의 이모 얘기를 들으며 소설화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모델과 창작된 캐릭터는 다르다. 나는 이 소설과 그녀의 실제 삶이 혼동되지 않기를 바란다.”

작품은 공연 연출을 하는 소설 속 화자인 ‘나’와 음악 감독을 하는 김혜련의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물 흐르듯 추적해간다. 재수생이던 나는 소꿉놀이를 하던 이국적 외모의 소녀에게 끌리고, 세월이 흘러 둘은 부산의 한 작은 극단의 조연출과 풋내기 음악 감독으로 만난다. 작품 후 헤어졌던 이들은 공연이라는 운명적 매개체를 통해 서울 대학로나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우연히 만나 반가워하고, 인연에 놀라하며, 다시 작품을 하곤 헤어진다.

반복되는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둘은 가까워지지만, 닿을 듯 말 듯한 관계는 세월의 흐름 속에 희석되고 잊혀진다. “집착은 그리움의 다른 말이며 시간의 파괴력에 대한 부질없는 저항이지만 그게 부질없기에 진한 연민과 감동을 느끼게 한다”고 작가는 ‘나’를 통해 말한다.

둘의 연민의 관계 외에도 옛 소련의 침공으로 리투아니아를 떠나온 김혜련의 가족사가 펼쳐진다. 약소국의 수난사와 그것을 온몸으로 헤쳐온 한 가족의 삶은 지구 반대편에서도 똑같다.

작품을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이들의 뮤지컬 창작 스토리다. ‘나’와 김혜련 등은 뉴욕 브로드웨이의 공연들을 닥치는 대로 보며 월북한 시인 임화의 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다룬 창작 뮤지컬을 제작한다. 아이디어 착안부터 이를 무대화하는 과정이 실감나게 그려져 눈길이 간다.

김혜련은 한국에서 유명 음악 감독으로 단숨에 떠오르지만 몇몇 스캔들이 보도되고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면서 순식간에 추락한다. ‘정파와 지역성에 바탕을 둔 논리로 무장하고 이제 막 열린 인터넷 광장을 선점한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대자보로 무자비한 한국판 문화혁명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게 작가의 배경 설명. 2001년 좌파 시민단체들로부터 ‘현대판 분서갱유’를 당했던 작가는 이국에서 온 음악 감독의 눈을 통해 우리 문화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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