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발로 뛰고, 찾아낸 3·1 운동의 흔적들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28일 16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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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 이런 역사의 현장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저희가 생활하는 곳과 멀지도 않은 곳이었습니다. 3·1독립운동의 현장을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수도권 거주 블로거)

동아일보가 2018년 3월 1일부터 이달 22일까지 93회에 걸쳐 보도한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인터넷 조회수가 100만 회를 넘어선 기사도 있었다. 그중 가장 빈도수가 높았던 반응은 “내가 사는 작은 마을이 독립을 위한 뜨거운 열망과 숭고한 희생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고맙다(아이디 2003****)”라는 것이었다.

취재기자들이 국내외 현장을 일일이 방문해 문서 등 자료들을 찾아보고, 지역 사학자와 현지 주민의 증언 등을 취재함으로써 “100년 전 상황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놀라웠다(충남 천안시 거주 독자 A 씨)”거나 “국사 시간 때 이런 거 못 배웠다. 이제라도 알게 돼 고맙다(meta****)”는 반응도 적잖았다. 일부 지역에선 자신들이 파악한 지역 만세운동 자료를 제공하며 취재를 요청해와 보도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에 대한 특종 보도도 이어졌고, 그동안 국내 언론에 주목받지 못했던 해외지역 만세운동에 대한 입체적인 조명이 이뤄지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시준 단국대 명예교수는 “3년에 걸쳐 이뤄진 이번 보도는 3·1운동 이후 1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성과도 훌륭했다”며 높이 평가했다.

● 자료에 파묻혀 지낸 3년의 대장정

취재팀은 3·1운동 100주년을 1년 앞둔 2018년 3월부터 기획 시리즈를 시작했다. 1부(14회)는 3·1운동의 배경과 전반적인 상황을 보여줄 수 있는 움직임에 초점을 맞춰 주 1회 또는 격주로 보도했다. 2부(15~93회)는 교과서 등에서 담지 못한 3·1운동의 보다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기로 했다. 특히 그동안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지역 독립운동을 주목하기로 했다. 매년 3월 1일이 되면 지역마다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지만 1919년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제대로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취재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00년 전 일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현장 취재에 앞서 국립중앙도서관,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등의 독립운동 관련 데이터베이스와 옛 서적들을 조사했다. 북한을 제외하곤 취재지역은 무조건 현장 답사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경우에 따라 일주일 이상의 사전 취재와 1박 2일의 현장 취재가 병행돼야 하는 곳도 있었다. 해외의 경우에는 2, 3개월에 걸친 자료 조사와 사전섭외 작업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지방자치단체와 3·1운동 관련 단체들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서울 경기 인천 19곳 △전라 광주 제주 11곳 △충청 9곳 △강원 4곳 △경상 부산 대구 울산 20곳 등을 소개했다. 2019년 2·8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일본 도쿄와 오사카를 현장 취재해 보도했고 올해 1월부터는 미국 러시아 중국 유럽 등 해외 독립운동 이야기를 7회에 걸쳐 생생하게 소개했다. 한반도 전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만큼 북한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지역 6곳도 다뤘다.

취재팀은 현장을 돌아다니며 3·1운동이 한국인의 생활과 가치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전문가들도 이에 동의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이종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회 위원장은 “3·1운동은 한민족의 강한 정체성, 나아가 민주주의 의식을 세계에 과시한 ‘한국적 굴기(¤起)’의 원형”이라고 말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100)는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국가 의식을 한 차원 높인 역사적 사건”이라며 “3·1운동 이전 개인과 가정에 머무르던 생활 단위가 3·1운동 이후 민족과 국가로 확대됐으며 이로 인해 만들어진 국가 의식은 한국의 근대사를 이루는 주축이 됐다”고 강조했다.

● 발로 뛰고, 제보로 찾아낸 특종들

취재팀은 그동안 학계와 국내 언론에서 미처 주목하지 못한 사실 발굴에 공을 들였다. 그 결과 다양한 특종을 쏟아낼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중국 상하이의 비밀 독립운동 결사체인 ‘동제사’(1~3화)였다. 취재를 통해 3·1운동 준비 과정에 동제사와 그 하위 조직인 신한청년당이 큰 역할을 했고, 동제사 수장 신규식과 파리강화회의 특사 김규식이 프랑스어로 작성한 독립청원서를 국내 언론으로는 처음 보도했다.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으로 평가받는 ‘2·8독립선언’(1화)이 거행된 장소를 찾아내고, 한국 무력독립투쟁의 원천지로 일컬어지는 서간도 신흥무관학교(27화)가 현지 거주 한인들로부터 모은 자금으로 무장투쟁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해낸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일부 특종 보도는 지역 전문가와 지역 주민들의 제보를 통해 만들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기 용인 만세운동(22화)이다. 이는 용인시의 지역 소모임 주민들이 향토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용인지역 독립운동가 16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정부의 공식 독립유공자 기록에는 누락돼 있던 얘기였다. 3·1운동에 단군을 받드는 ‘대종교’ 측이 깊숙이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곡성·담양 만세운동(83화)도 제보를 통해 특종으로 보도할 수 있었다.

취재팀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졌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 발굴에도 공을 들였다. 유관순 열사만 기억하기에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이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경기 수원 기생 만세운동(16회)을 시작으로 개성(당시) 출신의 여성 4인방이 주도한 개성 만세운동(17화), 대구 신명여학교 만세운동(29화) 등 모두 15차례에 걸쳐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는 전체 93회 가운데 16%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보도에 대한 반응도 뜨거웠다. “앞으로도 여성들이 참여한 독립운동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chlw****)”거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너무 많다. 학생 때부터 그분들의 삶을 배울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unoo****)라는 댓글이 이어졌다.

● 뜨거운 반응에 웃고, 서글픈 현실에 눈물짓다

취재팀은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3·1운동 현장을 찾아다니며 지역적 특성을 찾아내고 이를 보도 내용에 반영했다. 주변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에서는 산상 봉화 시위가, 바다 혹은 강이 인접한 지역에서는 선상 시위가 함께 전개됐다. 이 외에 도심과 야산을 오가는 게릴라식 시위, 군대식 체제를 갖춰 이웃 지역과 연대한 시위 등 다양한 시위가 이어졌다.

이 같은 지역 만세운동 보도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현장을 쫓아다니며 쌓인 취재진의 피로를 씻어주기에 충분했다. 경기 파주시에 사는 한 60대 독자는 ‘파주 3·1운동(37화)’의 기사를 본 후 편집국으로 전화를 걸어와 “고향에서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우리 지역에 이런 3·1운동 역사가 있는 줄 몰랐다”며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돼 감사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독자(yeon****)는 “3·1운동 하면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대표적인 일화 몇 가지만 기억하곤 하는데,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여러 지역의 만세운동을 알게 돼 기쁘다”며 고마워했다. 보도에 대한 젊은 독자층의 반응도 뜨거웠다. 특히 경기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28화)편은 인터넷 조회수가 100만 회를 넘어서며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외에도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있었을까? 우리 아이한테 이런 훌륭한 분들을 가르쳐줄 수 있어서 감사하다(ouve****)”거나 “한국사 공부하면서 암기했던 인물들을 기사로 만나서 뭉클하다. 암울했던 역사의 처절하고 치열한 삶의 모습이 그려진다(waIt****)”는 반응들이 이어져 취재진이 묵직한 사명감을 갖게 했다. 연재가 거듭될수록 YMCA 대한간호사협회 등 3·1운동 관련 단체에서 취재팀에 강연을 요청하는 사례도 적잖았다. 취재팀이 현장을 누비면서 접한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취재 과정에서 취재진은 뜨거운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대부분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처한 현실을 보고 들을 때였다. 경남 창녕의 만세운동(61화)을 주도했던 김추은 지사의 손자 상현 씨는 “평생 독립운동을 한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빚뿐이었다”고 증언해 취재기자를 숙연하게 했다. 수원 만세운동(15화)을 주도한 김노적 지사의 아들 지형 씨가 “아버지가 만세운동을 하고 감옥에서 풀려난 후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으로 건너간 사이 가족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는 먹을 것이 떨어지면 이웃집에 동냥을 다니며 어린 4남매를 키우셨다. 생활이 너무 어려워 막내 여동생을 보육원에 맡겨야 했다”고 당시를 회고할 때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감추기 어려웠다. 수감 기록이나 사진과 같은 증빙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례도 적잖았다.

안영배 논설위원 ojong@com.com·성동기·김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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