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으로 간 ‘뼛속까지 국민 트레이너’ 최주영 前 대한축구협회 의무팀장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9일 13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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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선수들을 ‘페이스 투 페이스(Face to Face)’로 만나 ‘하트 투 하트(Heart to Heart)’ 로 통했다는 것 자체가 운명 아닐까요.”

한국 축구의 도약기라 할 수 있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년 세월 가까이 한국 축구의 레전드들을 돌보고 치료했던 최주영(67) 전 대한축구협회 의무팀장. 각각 4번의 월드컵과 올림픽, 아시아경기, 아시안컵 등 포함해 대표팀 300경기의 현장을 지킨 ‘국민 트레이너’다.

그가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을 도와 함께 4강 기적을 일궜던 박항서 베트남 축구 감독 곁에서 ‘의무팀 수석 트레이너’ 라는 공식 직함으로 인생 2막을 열었다. 대표팀 소집 시기 외에는 베트남 재계 서열 1위인 빈그룹이 운영하는 빈맥 재활병원에서 수석 트레이너로 근무를 한다.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영화처럼 스쳐가는 지난 날을 떠올리며 다가올 앞날의 각오를 다졌다.

● 프로야구단 트레이너 될 뻔… 부상 두려움부터 없앤 ‘감성’ 재활이 가장 보람

1982년부터 10여 년간 카타르배구협회 물리치료사로 일하다 귀국한 최 전 팀장은 1994년 은사의 추천으로 대한축구협회에서 일하게 됐다. 그는 “당시 새로 창단한 현대 프로야구단에 먼저 지원을 해서 합격을 해놓은 상태였다. 하마터면 내 인생에서 축구 대표팀은 없을 뻔 했다”고 웃었다.

지나고 보니 선수들의 마음으로 들어가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 가장 보람된 일이라고 했다.

“대표팀에서 처음 일할 때 만해도 물리적 치료에 대해서만 생각했어요. 그러다 선수들의 마음까지 들여다보면서 나중에는 선수가 다쳐도 전혀 걱정 안 되도록 하는 게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재활이라고 봤죠. 그게 ‘최주영’ 만의 재활 색깔이 됐죠.”

선수들의 신뢰가 밑받침이 됐오늘 선수들이 어디가 불편하고, 어떤 부위가 걱정스러운지, 심지어 그라운드 잔디 사정이 어떤지까지 세심하게 고려했다”고 했다. 스트레칭도 선수들마다 킥을 하거나 공을 뺐을 때 다리 각도를 평소 훈련 때 유심히 기록해 그에 맞게 해줬다. 빡빡한 스케줄, 주전 경쟁으로 지친 선수들을 위해 의무실이나 치료실은 ‘무한 프리토킹’의 장으로 개방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도록 했다.

“내 앞에서는 무슨 얘기라도 편하게 하라고 했어요. 대신 나만 알고 있었죠. 그러니까 선수들이 아주 여과 없이 해댔어요. 자연스럽게 아주 구체적으로 선수 정보가 쌓이더라고. 표정만 보고 말만 들어도 컨디션이 어떤지 한 눈에 알겠다니깐. 감독과 선수 사이에서 완충 작용, 이것도 트레이너 메디컬의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죠.”


● 내 안의 승부욕 깨운 비쇼베츠


축구 대표팀 의무 담당이 단순히 선수 부상 치료를 넘어 어떻게 하면 감독에게 만족을 줄 수 있을지를 처음 일깨워준 고마운 사람도 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축구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러시아 출신 비쇼베츠 감독이다. “부임 초반에는 내가 나름의 선수 관리 자료를 작성해 보고를 하면 계속 퉁명스럽게 반응을 해서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던 최 전 팀장은 결국 자신의 역할에 대한 애정으로 비쇼베츠 감독의 마음을 돌려놨다고 했다.

“훈련지가 사우디아라비아였는데, 식단 관리는 물론이고, 아랍어와 영어로 식당 매니저 미팅까지 주관하면서 관련 보고를 하니 감독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죠. 그 다음 유럽전지훈련에서는 수시로 어깨를 감싸고 축구와 관계없는 얘기도 하는 거예요. ‘쓰고 싶은 선수들을 제대로 관리해주겠다, 한 번 보라’는 마음으로 선수들이 어떤 자세에서 몇 번 공을 잡는 지까지 시시콜콜한 것 모두 깨알같이 적어 보여주곤 했죠. 내 이름 석자에 기대고 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처음 느끼게 해준 감독입니다.”


● 선수도 속이고 기자에게 통사정

외국인 감독이 선임되면서 국민적 기대가 컸던 애틀랜타 올림픽 축구. 아시아 지역 예선을 거쳐 본선 진출권을 따내는 과정에서 유난히 부상자가 속출해 진땀을 흘렸던 경험은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을 앞두고 미국 전지훈련에서 핵심 이기형(전 인천 감독)이 정강이를 다친 건 그의 트레이너 인생에서 1순위로 꼽는 초비상 사태다. 당시 말레이시아에서 열리는 최종 예선을 앞두고 대표팀 오른쪽 윙백이었던 이기형의 부상과 회복 여부는 굉장히 크고 민감한 뉴스였다. 비쇼베츠 감독이 전력 노출에 워낙 민감해 해서 최 전 팀장은 취재진을 만날 때마다 “모두 건강하다”라는 말밖에 하지 못할 때였다.

“보안을 유지하면서 국내 병원에서 MRI를 찍어보니 정강이 뼈가 부러졌더라고요. 그래도 조심스럽게 붙을 수 있는 여지가 보였죠. 그래서 감독에게는 ‘2주 정도면 뼈가 붙겠다’고 해놓고 선수 본인은 모르게 했어요. 그런데 한 기자 분이 부상을 알고 있었어요. 그 기자에게도 사정을 했죠. ‘본인이 부상을 알고 있으면 뛸 수가 없다. 상처가 크다’며 보도를 미뤄달라고 부탁을 했죠. 결국 부상이 완쾌됐지만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막상 최종 예선에 가니 주전 중앙수비수 조종화(현 옌벤 푸더 감독대행)가 심하게 허리를 다쳤다. 엑스레이상으로 심한 염좌 증세를 확인한 최 전 팀장은 몸도 제대로 못 움직일 정도였던 조종화를 밤새 얼음찜질을 하며 치료했다. 최 전 팀장은 “졸면서 치료해보기는 처음이었다”며 “아침에 물으니 선수가 아프지 않다며 오후 훈련에 나가더라. 지금도 유일하게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다”며 웃었다. 그는 “두 번의 경험을 하고나니 힘을 얻게 되더라. 이 뒤로 트레이너 일이 ‘마약’ 같다고 주변에 자연스럽게 얘기하게 됐다”고 말했다.


● 조마조마했던 안정환, 미안했던 이천수


4강 신화를 이뤘던 2002년 한일월드컵을 떠올리니 최근 예능 방송을 함께 찍었던 안정환을 얘기를 안 꺼낼 수 없다고 했다. 최 전 팀장은 “안정환이 월드컵 직전 제주도 캠프에서 마지막 평가전을 하고 발목을 다쳤다. 23명 엔트리에 못 들어갈까봐 조마조마하면서 재활을 시켰다”는 비화부터 서둘러 꺼냈다. 기적으로 역전승을 일군 16강 이탈리아 전에는 경기 직전 안정환에게 테이핑을 하는 와중에 테이핑 테이프가 끊어져 혹시 불길한 전조가 될까봐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

“걱정이 되더라고. 그런데 전반에 정환이가 페널티킥을 실축하는거야. 환장하겠다러고요. 후반 시작하기 전에 정환이는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즐겨’라고 얘기해줬는데, 연장에서 골든골을 넣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월드컵 개막 직전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상을 당한 이영표의 재활을 위해 의무팀과 사전 얘기 없이 네덜란드 출신 트레이너를 불러 들여 자존심이 상했던 해프닝은 트레이너를 처음 시작했던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계기라고 했다.

“항의를 하러 간 나를 보고 바로 미안하다는 히딩크 감독에게 ‘당신은 총사령관이다. 전쟁 중이기 때문에 대장인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따르겠다’고 했었죠. 자존심에 연연하지 말자, 본연의 초심으로 돌아갔던 순간이었어요.”

월드컵 내내 미안했던 선수는 이천수다. 최 전 팀장은 “천수가 막내급이었는데 형들이 치료를 받는 시간과 겹쳐 기다려야 할 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내가 가르쳐 준대로 아픈 부위가 있으면 혼자 연고도 잘 바르고 약을 챙겨가서 관리를 잘하더라. ‘아 이 친구, 프로 정신이 있구나’라고 속으로 미안해하고도 응원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 내 아픈 손가락 ‘둘’


부상으로 불운이 겹쳤던 역대 국가대표팀 스트라이커 ‘둘’은 그에게 아픈 손가락이다. 티낼 수 없었지만 신경이 특히 많이 쓰였던 선수들이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을 앞두고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불의의 부상을 당한 뒤 본선에서 한 경기라도 뛰려고 무진 애를 썼던 황선홍 전 FC서울 감독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그는 트레이너의 한계를 절감하기도 했다. “당시 인대가 끊어진 정도의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뭔가 만족스러울만한 ‘케어’를 해주지 못했어요. 황선홍의 경우 정신적 케어도 중요했었죠. 물리적으로 치료가 됐다고 해서 심리적으로 당한 부상이 낫는건 아니였어요. 선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염려와 고심, 무엇보다 자신 스스로 부상이 회복됐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되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그는 “4년 후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도 오른쪽 햄스트링 건염 통증이 있어서 자다가도 걱정을 많이했던 친구”라고 돌아봤다.

숱한 인연에서 이동국(전북)도 빼놓을 수 없다. 40세 나이에도 현역으로 뛰고 있는 이동국을 보면 어떻게 해서든지 2010년 남아공월드컵 만큼은 뛰게 해주고 싶었던 기억이 선하다. 최 전 팀장에 따르면 이동국은 2002년, 2006년 월드컵에 이어 2010년 월드컵도 못 갈 뻔 했다. 최 전 팀장은 “월드컵 최종 엔트리 발표를 3주 가량 남긴 시점에 동국이가 햄스트링을 다쳐 5주 진단이 나왔다. 내가 허정무 감독께 3주면 된다고 보고를 하고 오스트리아 훈련 때 정성을 다해 재활을 시켰다. 3주 만에 동국이가 정상 상태임을 입증하는 데이터 기록을 가지고 엔트리 23명 회의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마음을 놓고 월드컵 개막 직전 남아공 현지에서 도착해 첫 연습을 하고 나니 이동국이 다시 반대편 햄스트링 통증을 호소해 한 번 더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했다.


● 선수 돌보다 앰블런스 실려간 ‘뼛속까지 트레이너’

문득 드는 질문, 그도 아플까. 대표팀 선수들을 돌보지 못할 만큼 아픈 적이 있었을까. 태극 전사가 그라운드에 쓰러지면 누구보다 빨리 달려나갔고, 24시간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던 장본인에게 물으니 그도 철인은 아니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앞두고 아랍에미리트 전지훈련 당시 그는 신장 결석 증세로 식사는커녕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만큼 고통에 시달렸다고. 선수를 돌보다 티 안내고 화장실로 가 통증을 견뎌냈다.

최 전 팀장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김현태 코치를 붙잡고 내 방으로 가서 앰블런스를 불러달라고 했다. 응급실에서 다음 날 외래 진료를 받으라는데 하필 국경일이었다”며 “어쩔 수 없이 그날 대표팀 회식에서 맥주 2캔을 마시고 소변을 봤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통증이 없었다”며 아찔했던 에피소드를 전했다. 최 전 팀장에겐 ‘내 몸 과신해서는 안 된다. 뼛속부터 트레이너가 돼야 한다’고 자성하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얼떨결에 시작한 길을 운명처럼 가고 있다”는 그는 1996년 아시아컵 8강에서 이란에 2-6로 참패하고 귀국해서 당한 일을 문득 떠올렸다. 심기일전의 동기로 삼겠다는 각오다.

“공항 세관 직원이 ‘축구도 못하면서…’라며 전례 없이 대표팀 의약품 가방 등을 다 꺼내보라고 했었죠.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 때부터 명예에 연연하지 말자라는 결심이 들었어요. 다시 현장으로 들어가는 자체만으로 설렙니다. 내 할 몫이 있다는 게 즐거워요. 새롭게 도전하는 마음으로 재활의 진수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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