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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비밀병기에 분패… 처음으로 펑펑 울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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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비밀병기에 분패… 처음으로 펑펑 울었죠

김창혁전문기자 입력 2015-04-11 03:00수정 2015-04-25 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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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뚜기와 함께 하는 오뚜기 인생]‘사라예보 영웅’ 이에리사 의원
이에리사 의원의 사무실에는 탁구 선수 출신의 비서관이 있었다. 이 의원은 “국회에 체육을 많이 소개하는 것도 나의 임무”라고 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그건 뭐랄까, 검(劍)을 겨루기로 했는데 느닷없이 총질을 해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975년 인도 콜카타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2년 전 사라예보의 기적을 만든 한국팀은 2연패를 노리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구기 종목에서 처음으로 거둔 세계대회 우승,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또 한번 사라예보의 감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2연패를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게임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졌어요. 나는 원래 게임에 져도 울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경기장에서 숙소인 호텔까지 걸어가는 15분 내내 울었어요. 얼마나 억울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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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의 주역이었던 이에리사 의원(새누리당)은 그렇게 당시를 기억했다. 바로 ‘마(魔)의 이질(異質) 러버’ 때문이었다. 중국의 거신아이(葛新愛)가 들고 나온 이질 러버에 한국 대표팀의 이에리사와 정현숙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속수무책(束手無策), 그 말뜻 그대로였다.

우리에겐 사라예보의 기적이었지만, 중국에는 충격 그 자체였다. 중국은 한국팀의 사라예보 우승 필름을 전국의 탁구 선수들에게 보여주면서 ‘설욕’을 강조했다. 특히 19세에 불과했던 이에리사 선수의 루프 드라이브, 그 강력한 스핀을 막을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이질 러버는 그렇게 탄생했다.

“루프 드라이브의 회전을 무시하고 게임을 할 수 있는 러버가 바로 이질 러버예요. 중국의 거신아이 선수는 우리하고 시합을 하기 전까지는 그 러버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어요. 오직 우리하고 할 때만 사용했어요.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하고 졌어요. 5분 안에 한 게임이 끝나는데 언제 적응이 되겠어요? 울면서 호텔에 돌아와 자리에 누우니 하늘이 땅이고, 땅이 하늘이었어요. 그렇게 표현하는 게 맞을 거예요.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

이듬해인 1976년 국내 종합선수권 대회 때도 그랬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면서 빙글빙글 도는 아찔한 느낌이었다.

국내 최고의 탁구대회인 종합선수권 대회는 오늘의 이에리사를 길러내고, 단련시킨 무대였다.

서울 문영여중 손병수 코치의 눈에 띄어 서울로 올라온 이에리사는 중학교 3학년 때인 1969년 제23회 전국남녀종합탁구선수권대회에서 파란을 일으킨다. 15세 소녀가 학생부는 물론이고 일반부의 쟁쟁한 선배들까지 모조리 제압하고 우승한 것이다. 그것도 당시만 해도 여자 선수들에게는 드물었던 강력한 드라이브를 주 무기로….

1973년 사라예보의 기적을 만든 이에리사 선수. 진짜 국민영웅이었다.
이에리사는 그로부터 7년 동안 종합선수권 대회를 연패했다. 그녀의 7연패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는 신화다.

“10연패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만큼 그 대회에 애착이 강했어요. 그런데 8연패의 문턱에서 뜻밖의 좌절을 한 거죠. 후배인 이기원 선수하고 붙었는데 게임을 시작하려고 하면 천영석 코치가 이기원을 불러서 얘기하고, 또 하려고 하면 부르고…. 정말 끊임없이 신경전을 펼치는 거예요. 결국 5번째 세트 듀스 어게인까지 해서 졌는데, 내가 노쇠하거나 내 탁구가 한물가서 진 게 아니었어요.”

1954년생이니까 올해 61세다. 그런데도 이에리사 의원의 승부욕은 처음 종합선수권 대회를 휩쓸던 15세 소녀 때와 별로 다르지 않은 듯했다. 스포츠를 잘 모르는 기자에겐 솔직히, 승부욕이 좀 지나친 것 같았다.

―시합 말고도 그렇게 승부욕이 강하십니까? 매사를 승부로 생각하면 너무 힘들 것 같은데….

“승부욕이 없으면 운동 못해요. 그리고 저는 인생이 매일 저하고의 승부라고 생각해요. 힘들지만 새로운 도전을 극복해나가는 승부욕이 아니었으면 벌써 지쳤을 겁니다.”

―이제 국회의원까지 왔는데 다음 도전은….


“도전은 자리에 대한 도전이 아닙니다. 국회의원도 뜻밖에 하게 된 겁니다.(웃으며) 제가 하려고 했으면 (제 몸값이) 금값이었을 때 했겠죠. 그동안 이런저런 얘기도 많았지만 제가 뜻이 없었어요. 태릉선수촌장도 정말 생각을 안했어요. 자리는 주어지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열심히 살다보니 기회가 왔고,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한 것뿐이에요. 정말 자리에 대한 생각은 제로였어요.”

그녀는 1세대 여성체육인이다. 선수 때야 시합만 생각하면 됐지만 25세 이후 그녀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코치, 감독, 임원, 행정가, 국회의원으로 이어져온 여성체육인 1세대의 걸음걸이 앞에는 늘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돌부리가 버티고 있었다. 체육계는 우리 사회에서도 가장 남성중심적인 문화가 강한 분야였다.

“제가 우리 여성들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같이 발가벗고 목욕하는 사람들하고 같을 수가 있겠느냐?’고 말이죠. 체육계는 가장 열리지 않는 곳이에요. 게다가 국가올림픽위원회(NOC), 대한체육회(KOC)라는 이름 아래 (인권) 사각지대가 얼마나 많았어요? 정말 살아남기 힘들었어요(웃음).”

2013년 2월의 대한체육회장 선거도 그랬다. 대한체육회장은 ‘체육계의 대통령’이라는 자리. 문득 ‘자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녀가, 왜 대한체육회장 선거에까지 출마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왜 나간 겁니까?

“생각도 못했어요. 정말 어마어마한 자리잖아요? 그런데 막 국회의원이 됐는데 원로 체육인들이 찾아와서 ‘체육계가 엉망인데 왜 이러고 있느냐?’고 하시는 거예요. 국회의원도 됐으니 체육계 개혁을 위해 나서야 할 것 아니냐는 겁니다. 또 당시 회장이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이었는데, 그만두게 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4년간 해놓은 것도 없고, 명색이 재벌그룹 회장이지만 체육계를 위해 돈을 쓴 것도 없다는 거죠. 그런데 가만있으면 (박 회장이) 또 하게 돼 있었어요. 이미 (연임을 위한) 작업을 많이 해놨더라고요. 제가 두 달 가까이 고민했어요. 그러다 결단을 내렸어요. 떨어져도 망신당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젠 경기인들이 나가서 역할을 해야 할 시점이고, 새로운 관행을 만들어 줄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또 제가 태릉선수촌장도 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아름다운 도전으로 다가왔어요. 그게 다예요.”

마음먹은 즉시 출마 선언을 했다. 예상되는 후보들 가운데 가장 먼저 뜻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선거판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이에리사 의원이 출마 선언을 한 직후 박용성 회장이 “이제 이룰 것은 다 이뤘다”며 출마를 포기한다. 박 회장이 출마를 포기하자 체육계에서 박 회장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김정행 용인대 총장이 도전장을 던졌다.

2월 22일 치러진 선거 결과는 김정행 총장의 당선. 김 총장은 과반을 한 표 넘기는, 아슬아슬한 표차로 당선됐다.

“선거 결과를 보고 ‘당신이 해야 하는데 이게 뭐냐?’고 얘기하는 동료 의원들이 적지 않았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제가 그랬어요. ‘제가 됐으면 낙하산이라고 했을 것 아닙니까?’라고요. 선거가 끝난 다음에는 잡음이 하나라도 나오지 않도록 하는 데 최고의 목표를 뒀습니다.”

대한체육회장 선거 사흘 뒤가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이었다. 선거 과정과 결과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박 대통령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면 어떤 잡음도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녀는 출마를 결심했을 때도 “혹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과 교감이 있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교감 같은 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성대통령이 탄생한, 달라진 시대에 용기를 냈을 뿐”이라고 말했었다.

이에리사 의원이 요즘 매달리고 있는 체육계 현안은 태릉선수촌 보존 문제와 체육인 복지법 제정, 그리고 국립체육박물관 건립 문제.

특히 태릉선수촌은 내년이 설립 50주년이다.

“태릉선수촌이 설립된 게 1966년 6월 30일이에요. 태릉선수촌은 대한민국 체육의 심장이고 역사입니다. 그리고 문화재입니다. 왕릉도 중요하지만 태릉선수촌도 없애서는 안 될 문화유산입니다. 솔직히 말해 왕릉만 중요합니까? 문화재도 보호하고 선수촌도 보전하는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현재 여름올림픽 종목은 2017년까지, 겨울올림픽 종목은 2018년 평창 올림픽 이후 모두 충북 진천의 선수촌으로 이사 가는 걸로 돼 있는데, 한번 이사 가면 다시 못 옵니다. 그러면 엘리트 체육은 더욱 어려워질 겁니다.”

태릉선수촌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각별하다. 여성 최초로, 선수 최초로 태릉선수촌장(2005년 3월∼2009년 2월)을 맡았다고 해서가 아니다.

장미란 선수도 그렇고, 박태환 선수도 그렇겠지만 그녀에게 태릉선수촌은 집이고, 삶이었다.

“선수촌장 할 때도 제가 선수들의 부모하고 견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버팀목이 돼주고 싶었어요. 태환이만 해도 중학교 때부터 봤어요. 선수촌 안에서 지나가다 태환이가 우유를 먹는 걸 보면 ‘왜 우유를 먹느냐, 밥을 먹어야지’라며 등을 두들기곤 했는데…. 요즘 태환이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파요. 아이들은 선수촌에서 모든 걸 쏟아붓고 인생을 거는 거잖아요?”

그녀는 심지어 ‘진천 선수촌’에 대해 “아이들을 사육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까지 했다. “태릉만 해도 아이들이 잠깐 나가서 당구도 치고, 영화도 볼 수 있어요. 그냥 못 본 척할 뿐이지 다 알죠. 그런데 아이들에게 그런 숨통도 틔워주지 않고 오직 운동만 하라고 하는 건 사육과 마찬가지예요. 제가 태릉선수촌장을 하면서 대문도 바꿔보고, 꽃을 어디에 심을까 고민하고, 아이들이 큰길 대신 이용하는 ‘지름길’에도 대리석을 깔아 질척거리지 않게 하고, 밤에 불이 없어도 계단을 타다닥 하고 내려올 수 있게 계단의 높이를 균일하게 맞추고… 왜 그런 일에 그렇게 신경을 쓴 줄 아세요? 태릉이 아이들에겐 집이고 삶이기 때문이에요. 집은 머무르고 싶고, 편안하고, 행복한 곳이어야 하잖아요?”

태릉선수촌 문제도, 법안도 그녀에겐 모두 ‘도전’이다.

“어느 모임에 가면 이제 가운데 자리에 앉는 나이가 됐어요. 그동안 별별 이야기를 다 들었어요. 여자라서 그렇다는 둥, 결혼을 안 한 히스테리일 것이라는 둥…. 저에겐 모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분발하는 계기가 됐어요.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모두 소중한 과정인 것 같아요.”


▼“소나기 피하자는 식… 체육계 병폐 악순환 못 끊어”

남은 임기 1년, 마음 바쁜 李의원

이에리사 의원을 인터뷰하면서 느낀 게 있었다. ‘비례대표의 정답’을 봤다고나 할까, 그 비슷한 느낌이었다.

지역구 국회의원이 말 그대로 ‘지역(선거구)’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라면, 비례대표 국회의원은 거기에 ‘직능’을 보충하는 게 원래 역할이다. 그러나 비례대표제를 처음 도입한 전두환 시대를 빼고, 그런 취지를 제대로 살려 국회의원 후보를 공천한 적은 별로 없었다.

16대 국회 때 체육계의 거물인 김운용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을 지낸 적은 있다. 하지만 그는 체육인이라기보다는 ‘체육행정가’, 아니 정치인이었다. 그 외에도 국회에 진출한 체육계 인사는 대부분 체육단체장 출신이었다.

이에리사 의원처럼 ‘직능’에 충실한 경우는 없었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제의를 받아 새누리당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할 때 그녀의 순번은 9번. 박근혜 후보의 비례대표 순번은 11번이었다. 박 비대위원장의 신뢰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실제로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의 체육공약은 거의 대부분 이에리사 의원의 손을 거쳤다.

“체육중고교, 체육대학, 태릉선수촌… 이런 거 다 박정희 대통령 때 만든 거예요. 박근혜 대통령은 어릴 때부터 (체육발전에) 관심을 가지면서 자라신 거예요. 안현수 선수 사건 때 하신 말씀(“체육계 저변에 깔린 부조리 때문 아닌가?”)도 제가 보기에는 충분히 하실 수 있는 것이었어요. 체육계의 문제를 올바로 보고 계시다는 말씀이잖아요? 하지만 (정부 부처들은) 다들 소나기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대통령이 같은 말씀을 자꾸 되풀이하게 되는 거죠.”

이에리사 의원의 남은 임기는 이제 1년. 그녀는 마음이 바쁜 듯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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