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DJ 잇따라 대통령 만든 ‘킹메이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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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1926~2018]1987년 민주화 이후 ‘3김 정치’
정치발전 기여… 지역주의 그늘도
충청맹주 JP, 정계개편 중심에… 박정희 정권부터 ‘영원한 2인자’

DJ, YS 그리고 JP….

영문 머리글자만 봐도 누구나 아는 계파의 보스이자 영·호남·충청의 지역 맹주로 군림한 ‘3김(金) 정치’는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을 계기로 정치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이어 23일 김종필 전 총리가 타계하면서 3김 정치는 그 물리적 존재마저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게 됐다. 3김 정치는 197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직후 잠시 찾아온 ‘서울의 봄’과 함께 태동했다. YS와 DJ는 박정희 정권에 맞선 야권 대표 주자였고 JP는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2인자였다. 그러나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로 ‘서울의 봄’은 짧았고 3김에게 닥친 시련은 길었다. 1981년 DJ는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고, YS는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JP는 ‘유신 잔당’에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을 몰수당한 뒤 미국으로 쫓겨났다.

와신상담 끝에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3김은 정계에 복귀했다. 그해 말 3김은 대선에 나란히 출마했다. 그러나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에게 대권을 내준다. 대선에선 실패했지만 각자가 지역 상징성을 확인하면서 3김 정치의 틀은 이때 완성됐다. YS의 통일민주당과 DJ의 평화민주당, JP의 신민주공화당은 이듬해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각각 부산경남과 호남, 충청에서 선전하며 첫 여소야대 국회를 만들어냈다.

이미 박정희 정권을 만들었던 킹메이커로서 JP의 행보는 1990년 3당 합당에서 다시 한번 가동됐다. JP의 지원을 받은 YS는 1992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 후 내부투쟁 끝에 YS와 결별하고 1995년 2월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 JP는 1997년 대선에서는 DJ의 손을 들어줬다. 그해 10월 27일 심야에 도움을 청하려고 자택을 찾아온 DJ에게 고인은 “박정희 대통령이 진 빚을 갚아드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측근들에게 “호남이 정권을 잡도록 해 수십 년 묵은 한을 풀어주자”고 설득했다.

3김 정치는 군사독재 정권의 잔재를 일소하고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데 그 나름대로 기여했지만 지역주의라는 큰 짐을 한국 정치에 던졌다. 그 폐해는 오래갔다. YS와 DJ, JP가 물러났는데도 특정 지역에서는 몰표를 받고, 다른 지역에서는 외면받는 선거결과가 한동안 이어졌다. 정치권에서는 3김 정치가 ‘보스 정치’라는 한계를 품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군사독재 폭압에 맞선 효율적인 투쟁을 위해 3김의 카리스마에 의존했지만, 정작 정당 내부의 민주주의에는 소홀했다는 것. 하지만 여야 간에 최소한의 소통도 이뤄지지 않는 정치 실종의 시대인 요즘엔 3김이 발휘했던 정치가 아쉽다는 말도 적지 않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킹메이커#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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