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소주 더” “아줌마, 계산” 아들뻘 손님도 반말 툭툭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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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바꿉니다/동아일보-채널A 공동 연중기획]
<1부>나는 동네북이 아닙니다

식당 종업원들은 매일 막말에 시달린다. 취재팀이 17일 서울 시내 식당에서 주문을 살펴보니 42건 중 15건이 반말이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18일 낮,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한식당.

20대 남성 5명이 “여기! 소주 하나 더!”라며 거칠게 주문을 했다. 종업원이 정신없이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다른 테이블에서 또 쉴 새 없이 벨이 울린다. 허둥지둥 가보니 아들뻘로 보이는 손님 하나가 반말로 “아까 시켰는데 왜 안 나오냐”며 손에 든 소주병을 낚아챘다.

○ 주문 중 태반이 반말

“아줌마, 계산!”

소주를 시켰던 남성들이 식사를 끝내고 계산대 앞에 섰다. 허겁지겁 물 묻은 손을 닦으며 신용카드를 받아 결제하려는데 카드 결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 괜히 죄지은 사람마냥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카드가 안 되는데요”라고 말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짜고짜 육두문자가 날아온다.

“아! ×발, 진짜∼.” 술에 잔뜩 취한 그는 “다른 데는 다 되는데 안 되긴 왜 안 돼”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기계가 이상한지 손님 카드가 이상한지 다른 걸로 한번 해보자”고 하자 더 심한 말이 돌아왔다. “×같은 불법 체류자 주제에.” 이 말에 대부분 중국 동포인 다른 종업원들의 심장까지 괜히 철렁거린다. 그들에겐 ‘불법 체류자’라는 말이 “여기서 꺼져”라는 말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이 식당에서 10년째 종업원으로 일하는 여성 조모 씨(50)에게 이런 상황은 일상적인 일이다. 조 씨는 “차라리 행패를 부리면 신고라도 하면 된다”면서 “욕이나 폭언은 그냥 참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다. 당하고 또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분하고 억울하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17일 저녁 서울 강남구, 동대문구, 종로구 일대 식당에서 손님과 식당 종업원 사이에 이뤄진 주문·요청 대화를 살펴봤다. 취재팀이 들은 42건의 주문 중 15건이 반말이었다. “여기 짬뽕 하나” “소주 하나 맥주 하나 줘” “아줌마, 계산” 이런 식이다. 호칭은 “저기(요)”가 16회 중 5회로 가장 많았다.

식당에서 막말을 하는 사람은 나이, 성별과 관계없었다. 식당에선 반말이나 막말이 손님에게 특권으로 간주되는 듯했다. 직장인 박후승 씨(37)는 “평소 어디 가면 말도 별로 없고 목소리도 크지 않은 편”이라면서 “그런데 괜히 국밥집 종업원 등을 상대할 때면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고 했다.

식당 종업원들은 어떨까. 익숙하면 무뎌질까? 종업원 김모 씨는 “막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나 귀 안 먹었다’고 소리친다. 하지만 먹고살기 빠듯한 형편에 사장 눈치 보느라 상상에만 그칠 뿐”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 식당 막말…그 안의 갑을관계

종업원들도 손님의 말에 ‘무시’가 담겨 있다는 사실은 잘 안다. 손님이 욕설이 아닌 반말만 해도 상처를 받는 이유다. 한국여성민우회는 2011년 식당 여성 종업원 284명에게 ‘일하면서 손님에게서 겪는 힘든 점’을 물었다. ‘무시하는 태도나 반말’이 153회(27.4%)로 가장 많았다.

동대문구 청량리동의 한 족발집에서 일하는 여성 김모 씨(57)는 “사실 막말 손님들 가고 나면 우리끼리 손님 욕도 한다. 일종의 뒤풀이다. 그날 그날 잊지 않으면 앞으로 장사하기 힘들다는 걸 알기에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전문가들은 식당 종업원에 대한 언어폭력 안에 갑을 관계나 왜곡된 권위 의식 등이 깔려 있다고 지적한다. 식당 종업원은 다른 서비스직과 비교해도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고 특별한 전문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별 볼일 없는 사람’이란 식으로 무시하는 인식이 팽배하다. 김원정 한국여성민우회 정책위원은 “임금 수준만으로 종사자를 평가절하하는 자체가 한국인들의 왜곡된 인식, 한국 문화의 부적절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식당 규모가 영세할수록 ‘나쁜 말’에 대한 피해가 심각하다는 사실도 이러한 설명을 뒷받침한다. 한국여성민우회 조사에 따르면 식당이 작거나 영세할수록 무시하는 경향이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시하는 태도나 반말’에 대한 응답은 △1∼4명 식당 76회 △5∼9명 식당 50회 △10명 이상 식당 15회였다.

이러한 상황은 식당 종업원의 자존감에 상처를 주고 사회적 지위와 관계된 이들의 의식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전우영 충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손님들이 계속 무시하고 그게 일상이 되면 종업원은 직업 현장에서 얻는 성과나 보람과는 무관하게 일단 자신의 일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또 “결국 자기 일에 대한 동력이 떨어져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적인 손실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 “보배라 부르니 아이 달라져”… “행복사회 만드는데 꼭 필요” ▼
독자들 말말말… 사연 계속 받습니다


본보 연중기획 ‘말이 세상을 바꿉니다’ 시리즈가 새해 첫날 지면에 실린 이후 취지에 공감하고 동참을 약속하는 독자들의 성원이 이어지고 있다. 독자들은 e메일을 통해 바른말을 실천하고 있는 사례를 전해오기도 하고 자신이 말로 인해 상처를 받은 기억을 털어놓기도 했다.

중국 산둥(山東) 성 웨이하이(威海) 시에 있는 중세한국국제학교는 “학생들을 보배들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용규 교장은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교직원은 물론이고 학부모들도 7년째 보배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보배라고 불린 아이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말을 쓴다”고 말했다.

경북 성주군 성주경찰서는 아이들의 언어가 폭력적으로 변하면서 학교폭력까지 심해지고 있다고 보고 고운말 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한 사연을 알려 왔다. 지난 2학기에 성주군 14개 초등학교에 칭찬 돼지와 욕먹는 돼지 저금통을 비치해 놓고 친구가 좋은 말을 할 때는 칭찬 돼지에, 나쁜 말을 할 때는 욕먹는 돼지에 각각의 말을 적어 넣게 한 결과 눈에 띄게 욕설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독자들이 알려 준 모범 사례는 올 한 해 지면을 통해 지속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나쁜 말의 폐해를 지적하는 독자도 많았다. 고교생 김혜원 양(17)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선생님이 욕을 쓴 적이 없었는데 중학교에 올라가니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지○한다’ ‘새△야’ ‘이거 ◇라이네’ 같은 말을 스스럼없이 써서 충격을 받았다”며 “선생님이 바른 말을 쓰지 않으면 아이들은 은연중에 나쁜 말을 써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말이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다양한 캠페인을 펼쳐 달라는 주문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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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사는 독자 허용환 씨는 “지난해 시작한 교통안전 시리즈(시동 꺼! 반칙운전)에 이어 올해 말에 대한 시리즈는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가장 필요한 기획이라 박수를 보낸다”면서 “명절을 앞두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역이나 시장에서 좋은 말을 쓰자는 운동을 전개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동아일보와 채널A는 독자들의 소중한 바람을 담아 자녀의 자존감을 살리는 말 사용하기, 직장 내 호칭 개선하기, 언어문화 교육 프로그램 보급, 문화예술을 통한 언어습관 개선 등 다양한 캠페인을 펼칠 계획이다. 사연이나 제안은 foryou@donga.com으로 보내면 된다.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반말#식당#언어 폭력#식당 종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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