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티시스트’ Mr. 로봇, 이브를 만나다

  • 입력 2008년 8월 5일 02시 58분


6일 개봉하는 ‘월·E’

퀴즈.

그는 조지 루커스 필생의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타워즈’(1977∼2005년) 여섯 편에 시종 똑같은 모습으로 출연했다. 대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기계음과 뒤뚱거리는 움직임이 연기의 전부. 하지만 그는 스타워즈의 상징이며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로 손꼽힌다. 그는 누구일까.

그 영화의 팬이라면 어렵지 않을 질문. 다름 아닌 ‘R2-D2’다.

6일 개봉하는 픽사의 새 애니메이션 ‘월·E’는 여러모로 R2-D2를 닮았다. 외로움에 한숨짓고 수줍게 연심(戀心)을 고백하고 뜻밖의 사건에 오두방정을 떠는 모습은 그보다 훨씬 다이내믹하지만, 말없이 타인을 배려하는 착한 난쟁이 로봇의 정겨운 실루엣은 영락없는 R2-D2다.

실제로 이 애니메이션의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은 앤드루 스탠턴은 “R2-D2를 주연으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1994년 픽사 임원들의 점심식사 브레인스토밍에서 순위가 한참 뒤로 밀린 메모 한 장이 단초가 됐다. ‘폐기처분된 지구에 잘못 남겨진 마지막 로봇.’

월·E(Wall·E)는 ‘지구폐기물수거처리용 로봇(Waste Allocation Load Lifter Earth-Class)’의 약자다. 쓰레기장이 된 지구를 떠나면서 인간이 남긴 청소로봇. 그런데 이 로봇은 치명적 결함을 지녔다. 호기심과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성품을 갖게 된 것이다.

마음을 가진 ‘로봇답지 않은 로봇’ 월·E는 유선형의 백색 탐사로봇 ‘이브’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연인과 함께하는 충만함과 그를 잃는 상실감이 차례로 다가오고, ‘니모를 찾아서’(2003년)에서 미지의 바다로 떠났던 아빠물고기처럼 월·E도 연인을 찾아 우주로 나선다.

‘토이 스토리’(1995년) 이후 컴퓨터그래픽(CG) 애니메이션이 일반화되면서 픽사와 드림웍스가 경쟁적으로 강조한 것은 시각적 사실감이었다. 하지만 최근 두 회사는 ‘몬스터 주식회사’(2001년) 괴물의 파란색 털과 ‘슈렉’(2001년) 녹색 털의 섬세함을 겨루기보다는 캐릭터와 스토리의 섬세함에 집중하게 된 듯하다.

인간다움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데 ‘말’이 그다지 좋은 도구가 아님을 강조하고 싶었던 스탠턴 감독은 제작사의 만류를 무릅쓰고 ‘첨단 CG 기술을 사용한 무성영화’를 내놓았다. 날카로움과 화려함을 버린 화면은 흑백영화에 색을 입힌 듯 투박하지만 따스하다.

감독이 영입한 비장의 무기는 30년 경력의 베테랑 사운드 디자이너 벤 버트. 그는 스타워즈에서 R2-D2의 ‘목소리’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역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ET’(1982년)의 목소리도 그가 만들었다.

버트는 “완벽한 기계음이되 인간적인 친근함과 사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소리”를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전자음과 사람 목소리, 기계 모터 소리 등 다양한 음원을 혼합해 월·E의 목소리에 체온을 불어넣었다.

로맨티시스트 월·E가 꿈꾸는 이상적인 애정행위는 연인과 나란히 서서 손을 잡는 것. 영화 초반 월·E는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친 후 혼자 멜로영화 비디오를 반복해 보며 한숨을 쉰다. TV 화면에 흐르는 것은 진 켈리 감독의 1969년작 ‘헬로 돌리’.

이 순진한 로맨스 영화에 심취한 로봇 월·E는 이브와 나란히 앉아 지구의 폐허에 내려앉는 저녁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사랑의 충만함을 체험한다. 이 장면은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1936년) 마지막 장면에서 다정히 손을 붙들고 화면 너머로 사라지던 두 연인을 빼닮았다. 그것은 지구를 폐기처분한 비인간적인 인간들에게 감독이 권하는 잃어버린 이상향의 광경이다.

선배 우주 공상과학(SF) 영화에 대한 은근한 헌사도 숨어 있다. 우주선 메인컴퓨터의 목소리를 ‘에일리언’(1979년)의 여전사 시고니 위버가 맡은 것이 한 예다. 승객들의 운명이 어찌 되건 주어진 비밀 지령을 강행하려는 자동항법로봇 ‘오토’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년)에 나왔던 컴퓨터 ‘할’을 연상시키며 SF 팬들에게 묘한 감흥을 준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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