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있어 지금도 있다

  • 입력 2008년 6월 6일 02시 53분


“폭격명령 어겨 사형선고 받더라도 문화유산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태우려면 나도 태워달라”

상원사 한암스님 정좌에

군인들 문짝만 뜯어 소각

■ 6·25 포화 속 목숨 걸고 문화재 지켜낸 이들

《“해인사만 없어지는 게 아니라 팔만대장경도 없어지는 거 아닙니까. 명령을 어겨 사형 선고 받아도 상관없었어요. 어떻게든 우리 문화유산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5일 문화재청 주최로 서울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눌와) 출판 기념회에 참석해 감사장을 받은 장지량(84) 전 공군참모총장의 표정이 다시 결연해졌다.》

그는 6·25전쟁 때 폭격 명령을 거부하고 해인사를 지켜냈다.

‘수난의 문화재…’는 임진왜란, 6·25전쟁 등 수난 속에서 문화재를 지켰거나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를 다시 찾아온 숨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제53회 현충일을 맞아 6·25전쟁의 포화 속에 목숨을 걸고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경남 합천군 해인사, 전남 구례군 화엄사, 서울 덕수궁 등을 지켜낸 일화를 되돌아본다.


▲ 영상 취재 : 이훈구 기자

장 전 총장이 제1전투비행단 작전참모를 맡았던 1951년 8월. 퇴각 중인 북한군이 해인사에 숨어들었다. 미 공군작전본부는 장 전 총장에게 해인사 폭격을 명령했다.

‘북한군의 목적은 식량 탈취이기 때문에 2, 3일이면 해인사에서 나올 것이다. 1400년 된 문화재를 한 줌 재로 만들 수 없다.’ 고민 끝에 그는 미군 고문단 작전장교에게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파리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 장군이 독일군에게 항복한 일, 미군이 일본 폭격 때 문화유산의 보고인 교토(京都)를 공습하지 않은 일을 떠올려 달라!”

장 총장은 끝내 출격하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공습이 취소됐고 해인사 장경판전(국보 52호)과 팔만대장경판(국보 32호)이 보존돼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의 반열에 올랐다. 이 일로 그는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까지 받았으나 문화재를 살려내기 위한 진심을 상부에서 알아준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

1950년 9월 서울 수복 작전 때 제임스 해밀턴 딜(1927∼) 당시 미군 포병 장교는 덕수궁으로 숨어든 북한군을 포격하지 않았다. 그는 수기에서 “포격을 하면 적은 괴멸시킬 수 있지만 동시에 오랜 역사를 지닌 한 국가의 유물이 포격 개시라는 말 한 마디로 몇 분 안에 사라진다. 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당시 정황을 설명했다.

“절을 태우는 데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1000년 이상 세월로도 부족하다.”

6·25전쟁 중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은 차일혁(1920∼1958) 당시 경찰대 제2연대장이 엄숙히 내뱉은 말이다. 그는 화엄사 각황전 문짝만 떼어내 태웠다. 상부 명령을 이행하면서 화엄사를 살리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 덕분에 화엄사 각황전(국보 67호), 사사자삼층석탑(국보 35호)의 웅장한 모습을 지금도 볼 수 있는 셈이다.

강원 평창군 상원사 동종(국보 36호)도 비슷한 곡절을 겪었다.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던 국군은 민간시설물 소각 명령을 받고 상원사를 태우려 했다. 상원사 동종이 소실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이 절의 한암(1897∼1951) 스님이 가사와 장삼을 갖추고 법당으로 들어가 불상 앞에 정좌했다.

“이제 불을 질러도 좋다. 중이란 죽으면 화장을 하는 법. 나를 억지로 끌어내려 하지 말고 불을 지르게.” 스님의 기개 앞에 군인들은 법당 문짝만 뜯어내 태우고 떠났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dongA.com에 동영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