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절 어떻게 새로 지을까”… 남원 실상사는 지금 실험 중

  • 입력 2008년 5월 30일 03시 02분


산속이 아니라 들판 한가운데 있는 전북 남원시의 실상사. 그래서인지 실상사의 분위기는 고즈넉하다(위). 천왕문 앞에서 토란을 일구는 스님과 주민들의 모습에서 이들의 인간적인 소통을 엿볼 수 있다(아래 오른쪽). 많은 사람은 앞으로도 이 같은 실상사다움이 잘 유지되길 기대한다. 24일 사부대중이 한데 모여 ‘실상사 절 불사,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놓고 허심탄회한 세미나를 열었다(아래 왼쪽). 사진 제공 실상사
산속이 아니라 들판 한가운데 있는 전북 남원시의 실상사. 그래서인지 실상사의 분위기는 고즈넉하다(위). 천왕문 앞에서 토란을 일구는 스님과 주민들의 모습에서 이들의 인간적인 소통을 엿볼 수 있다(아래 오른쪽). 많은 사람은 앞으로도 이 같은 실상사다움이 잘 유지되길 기대한다. 24일 사부대중이 한데 모여 ‘실상사 절 불사,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놓고 허심탄회한 세미나를 열었다(아래 왼쪽). 사진 제공 실상사
“귀를 열고 대중과 ‘소통’합니다”

통일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최초의 가람으로 9세기 초 산문(山門)을 연 전북 남원시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 이곳에서 요즘 작지만 소중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사찰 불사(佛事)를 위한 공개적이고 지속적인 논의와 토론이다. 너무 당연한 듯 보이지만 불사를 앞두고 그 방향에 대해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것은 최근 유례가 드문 일. 낮은 자세, 열린 마음이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논의의 주제는 ‘실상사 절 불사,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금까지 우리의 불사는 주지 스님의 의지대로 일방적으로 이뤄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돈 많이 들이고 크게 지으려는 경향이 강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진정한 불사가 아닙니다. 사부대중의 의견을 모아 차분하게 진행해야 진정한 불사라고 할 수 있죠.”(실상사 주지 재연 스님)

웅장했던 실상사는 1883년 유생들의 방화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고 이듬해 보광전 등 10여 채의 전각을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6∼2005년 발굴이 이뤄지면서 사찰 원래의 위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상사는 이에 따라 언젠가는 복원이든 중창이든 불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해 지난해부터 준비와 논의를 시작했다.

올해 2월과 지난주 두 차례의 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미나에 참가한 스님, 건축 및 조경 전문가, 디자이너, 불자, 마을 주민들은 한국 사찰 불사에 대한 반성을 촉구했다.

“최근의 불사는 환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워 둬야 할 곳은 비워 둬야 하는데 그 빈터를 무시하고 빼곡히 건물만 짓습니다. 사찰 박물관이 경관을 해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이상해 성균관대 교수)

“빗자루질 자국이 남은 정갈한 마당이 사찰의 매력인데 요즘엔 콘크리트 포장이 늘고 있습니다. 마당에 작고 아담하게 초화를 심었던 전통을 깨고 지나치게 큰 나무를 많이 심어 분위기를 해치는 경우도 많죠.”(홍광표 동국대 교수)

실상사의 입지의 특성을 잘 살려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유명 전통사찰이 대부분 산속에 있지만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에 있다. 절이 산을 나와 사람들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실상사 입구에 장승들이 서 있고 실상사 옆에서 스님들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밭을 일군다. 건축가 정기용 성균관대 석좌교수는 “실상사 불사는 자연과 인간과 불교의 조화여야 하고 그래서 실상사는 여전히 이웃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는 좀 더 구체적인 토론이 마련된다. 여름방학이 되면 성균관대 건축과 학생들과 함께 사찰 불사를 주제로 워크숍을 열고 10월경 또 한 차례의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어 올해 말, 재연 스님과 참가자들은 세미나 성과를 토대로 ‘실상사 선언’을 발표하는 것도 고려 중이다. 이 선언은 21세기 한국 사찰 불사에 있어서의 방향과 원칙 등을 담은 일종의 가이드라인. 이를 통해 잘못된 불사를 바로잡겠다는 의욕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실상사의 불사 일정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재연 스님은 “2009년 말까지 불사의 기본 조감도를 완성했으면 하지만 상황에 따라 불사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불사로 인해 지금 실상사의 아름다운 분위기, 실상사다운 분위기가 훼손될 수 있다고 의견이 모아지면 불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재연 스님의 말.

“불사에 관해 터놓고 논의하는 과정이 불사 자체보다 더 중요한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건물을 짓는 것이 불사가 아니라 실상사다움과 불교다움을 유지하는 것, 그게 진정한 불사가 아닐까요.”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