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정부 출범3개월]<3>혼자 뛰는 대통령…

  • 입력 2008년 5월 26일 02시 57분


뒷짐… 눈치… 시늉… 관료사회 시계는 아직도 盧정부?

《청와대 행정관 A 씨는 최근 오전이면 사무실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는 일이 잦아졌다. 소관 부처 관계자에게 전화로 특정 정책과 관련된 자료 제출을 부탁했는데 좀처럼 움직이지 않자 아예 직접 부처를 방문키로 한 것. A 씨는 “직접 가서 독촉하자 움직이니 그나마 나는 상황이 나은 편”이라며 “청와대와 달리 관료사회는 여전히 정권교체의 무풍지대”라고 말했다. 새 정부 출범 후 공무원으로 변신한 여권 핵심 관계자의 토로는 더 절절하다. “변화가 이렇게 힘든지 몰랐다. 뭘 하나 지시했는데 한 달 반이 지나도 실무 차원에서 합의조차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고급 행정’이 가능하겠느냐.”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10년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했지만, 정작 관료사회와 그들이 구축한 행정문화라는 거대한 벽에 부닥쳐 표류하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

○ 여전한 복지부동

이 대통령은 당선 후 줄곧 공조직의 효율성을 강화하겠다고 밝혀왔지만, 아직까지 관료사회의 선제적 행정 대응이나 부처 간 입체적 공조 등은 찾아보기 어렵다.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을 둘러싼 논란이 급속히 확대돼 가던 4일 정부 여당은 고위 당-정-청 협의를 열고 관련 대책을 논의했으나 정작 농식품부는 “회의에서는 기본적인 사실관계만을 보고했고 관련 대책은 한나라당에서 밝히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같은 날 한나라당은 오히려 농식품부 관할 사항이라고 말했다. 주무 부처로서 쇠고기 논란 관련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류인플루엔자(AI) 사태에 대해서도 AI가 발생한 농장에서 가금류를 불법 반출해 판매한 유통업자가 있을 정도로 농식품부의 초기 대응은 안이했다는 지적이 많다. 농식품부는 AI가 발생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쇠고기 문제와 AI 문제를 1, 2차관에게 분장하는 ‘뒷북 행정’을 보이기도 했다. 그 전까지는 식품 문제에 익숙하지 않은 해양수산부 출신 박덕배 2차관이 두 대형 악재를 실무 지휘해 왔다.

대통령의 발언이나 생각이 알려진 뒤에야 부랴부랴 관련 정책을 생산하는 관행도 여전하다. 기획재정부는 4월 17일 오전부터 청와대와 여권의 진의를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동아일보가 이날 이 대통령이 공기업 임직원들의 연봉에 대한 합리적 개선책을 강구하라는 내용을 보도한 데 따른 것.

재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대통령의 발언이 공개되자 ‘이런 사안은 대통령이 지시하지 않아도 우리가 자발적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등 좀 부끄러운 상황이 펼쳐졌다”고 전했다. 재정부는 그 후 한 달도 안 된 5월 13일 일부 공공기관장의 급여를 낮추는 데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한 ‘공공기관 경영계약제’를 발표했다.

청와대의 눈치를 보느라 다소 비현실적인 정책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지난달 국무총리실은 글로벌 인재를 육성하겠다며 ‘글로벌 인재 10만 양성’ 정책을 발표했다. 해외봉사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병역 혜택 확대를 검토하겠다고 해 주목을 끌었으나 구체적인 추진 계획의 틀조차 마련되지 않아 혼선을 빚었다.

○ 더 높아진 부처 간 장벽과 자기 방어

정부조직 개편과 맞물려 부처 간에는 소리 없는 견제와 싸움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와 과학기술부가 합쳐진 교육과학기술부는 아직 새 정부가 요구하는 과학과 교육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어 보인다. 두 부처가 통합하는 과정에서 1009명에서 812명으로 인력이 줄어든 게 갈등의 주된 원인. 교육부 출신들은 “우리는 늦게까지 일하는데 과기부 출신들은 일찍 퇴근한다”며 불만이고, 과기부 출신들은 “세간의 관심을 교육부 출신들이 독차지하고 있다”며 공공연히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환경부와 행정안전부는 물산업육성지원법의 제정을 놓고 고질적인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환경부가 상하수도 사업자 간의 경쟁을 유도한다는 취지로 법안에 ‘환경부 장관은 (지방자치단체의) 상하수도사업 운영 실태에 대한 평가를 매년 실시한 후 그 결과를 공표한다’는 내용을 포함시키자 행안부가 반대하고 나선 것.

행안부는 “지자체에 대한 평가는 행안부의 고유 업무”라며 반발했고 급기야 22일로 예정됐던 관련 입법예고는 잠정 연기됐다.

○ 일부 장관은 아직 부처 장악 중

이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장관들이 각 부처를 신속하게 장악해 관료사회에 휘둘리지 말 것을 주문했으나 일부 부처에서는 거의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 국회의 해임건의안이라는 화살을 가까스로 피한 정운천 농식품부 장관은 여전히 여권 내부에서 자질부족론이 나오고 있다. 쇠고기 관련 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김성이 보건복지가족부 장관도 다양한 복지 정책을 추진하는 데 적격인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일부 장관들은 부처 장악을 시도하고 있으나 오히려 직원들과의 소통 부재를 낳고 있다. 이 대통령의 경제 참모이기도 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대부분의 회의에서 강한 어조로 정책 추진을 지시하고 있으나 핵심 간부들조차 의견을 제기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오랜 기간 민간기업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이 대통령이 관료사회를 개혁해야 할 ‘앙시앙 레짐(구체제)’으로 규정하면서 새 정부의 순항을 위한 관료사회와의 매끄러운 ‘소통’에 실패한 데 따른 부작용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경제 부처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 대통령이 공무원들을 지나치게 반개혁 세력으로 규정하다 보니 자기 방어 차원에서 공직사회가 더더욱 움츠러들고 복지부동하게 되는 것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냈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당-정-청 조정할 컨트롤타워 시급

‘脫여의도’ 집착 말고 타협 나서야▼

관료 사회가 이명박 정부의 핵심 국정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정 운영 철학에 대한 청와대와 관료 사회 간의 진정한 교감 확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여권 내에서 나오고 있다.

특히 이 대통령이 취임 전부터 규제 완화, 정부 조직 개편 등 공직 사회가 긴장할 수밖에 없는 정책을 잇달아 발표하는 과정에서 기존 관료 사회는 저항했고, 최근의 국정 난맥상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라는 것.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관료 사회와 정권 차원의 진솔한 소통이 부족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경제 부처의 한 고위 관계자도 “공무원들이 새 정부의 정책 방향과 목표를 공유한 뒤 나름의 창의력을 갖고 이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서로 준비가 부족했다”고 진단했다. 대통령수석비서관의 기능과 역량을 보강해 소관 부처 장관과의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직 사회에 대한 평가 체계를 수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청와대의 다른 관계자는 “무조건 비판만 할 게 아니라 제대로 일하는 공무원들은 선택적으로 발굴해 민간 수준으로 보상하면 공직 사회도 신나서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공직 사회의 저항에 밀려 공공부문 개혁이 무산됐던 과거 정권의 실패를 교훈 삼아 점진적이면서도 끈질기게 공공부문 개혁을 진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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