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45년 영국공군, 독일 드레스덴 공습

  • 입력 2008년 2월 13일 02시 50분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이던 1945년 2월 13일 동부 독일의 드레스덴. 느닷없는 사이렌이 한밤의 고요를 깨뜨렸다.

“아흐퉁(Achtung·독일어로 ‘주의’라는 뜻)…. 적 폭격기 편대가 항로를 바꿨다. 우리 쪽으로 접근하고 있다.”

영국 공군의 랭커스터 폭격기 편대가 기수를 드레스덴으로 돌리자 독일 방공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엘베 강의 피렌체’로 불리던 드레스덴은 그동안 ‘공습의 무풍지대’였다. 전황이 바뀌면서 운명도 달라졌다. 동부 독일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 거점 도시에 대한 연합군의 공습이 시작된 것.

오후 10시 14분에 시작된 첫날 공습은 3시간 간격으로 2차례 이어졌다. 민간과 군사시설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공습은 ‘융단 폭격(Carpet bombing)’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수백 대의 폭격기는 수천 t의 고성능 소이탄(燒夷彈)을 드레스덴 상공에 뿌렸다. 폭탄은 ‘검은 양탄자’처럼 도시를 뒤덮었다. 소이탄이 떨어진 곳마다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97km 상공에서도 보였다는 불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날이 샜을 때 불바다가 된 도심의 온도는 1500도까지 올라갔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해질녘 엘베 강의 풍경에 반해 ‘유럽의 발코니’라고 불렀던 드레스덴은 철저하게 파괴됐다. 유럽 바로크 문화의 본산이라는 자부심도 공습과 함께 사라졌다. 대신 검게 그을린 처참한 시신만이 나뒹굴 뿐이었다. 훗날 사흘간의 공습으로 2만4000∼4만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됐다.

“나는 아들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대학살을 거들어서는 안 된다고 일렀다. 살육 기계를 제작하는 회사에 취직하지 말 것과 그런 기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멸시하라고 일렀다.”

미군으로 독일군의 포로가 돼 드레스덴 폭격을 목격한 미국인 소설가 커트 보넷은 ‘제5 도살장’, ‘태초의 밤’ 등의 반전 소설을 통해 드레스덴에서 받은 충격을 고발했다.

‘드레스덴의 비극’은 나치 독일의 잔학성과 승자 독식의 역사에 가려 기억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다. 하지만 역사는 묻고 있다. ‘영국군 한 명이 독일의 모든 도시보다 소중하다’는 승자의 오만과 융단 폭격의 희생자를 선전 선동의 도구로 여겼던 독일군 지휘부의 광기가 인류에게 남아 있는 한 비극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박용 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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