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용한 가족’으로 데뷔해 ‘반칙왕’ ‘장화, 홍련’ ‘달콤한 인생’ 등을 만들어 온 김지운은 어떤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도 작품에 자신의 인장을 선명하게 남길 줄 아는 감독이다. 그의 에세이집인 이 책을 읽다 보면 글에서도 ‘김지운 표’가 또렷하게 떠오른다.
긴장된 순간이 일상과 충돌해 돌연 황당해지며 어이없는 웃음을 자아내던 그의 코미디 영화들처럼, 이 책에서 그는 심각한 듯하더니 갑자기 툭 농담을 던지고 독자가 따라 웃다 보면 어느새 다시 진지해지는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또 ‘명품 호러’라고 불릴 만큼 정교하고 예쁜 공포영화 ‘장화, 홍련’처럼, ‘가벼운 읽을거리’라지만 말 한마디, 표현 하나에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책은 특별히 제한되지 않은 주제에 대한 에세이를 모은 1부, 영화배우 최민식 김혜수 임수정에 대한 촌평과 영화 제작기 및 인터뷰 등을 모은 2부로 구성됐다. 감독으로서의 특징이 뚜렷한 2부보다 여러 주제에 대해 ‘내 생각은 이런데요…’ 하고 말하듯 쓴 1부가 더 재미있다. 어느 글에서 그는 ‘지극히 개인적인 언어로 세상의 보편성과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 자신의 화두라고 썼는데 1부는 그런 화두 풀이라 할 만하다.
백수생활, 이웃, 버스정류장 등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 대해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 예민한 저자는 글 속에서 늘 뭔가를 관찰하고 골똘히 생각한다.
영화 만드는 솜씨와 축구 선수의 발끝 감각을 비교한 대목에는 감독으로서 저자가 지향하는 이상형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터무니없는 슛을 날리고도 아깝다는 표정으로 그라운드에 얼굴 파묻고 쥐어뜯는’ 한국 선수들이 아니라 ‘그림 같은 슛을 쏘고도 뒤도 안 돌아보고 제자리로 뛰어가는’ 지단이나 히바우두처럼 ‘무감(無感)한 강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설렁설렁 쉬운 글 안에서 치밀한 일면이 드러나는 1부의 글에도 그 비슷하게 ‘쿨한 고수’의 면모가 배어 있다. 그런 톤으로 끝까지 일관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뻔했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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