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법정 달군 재판 생생히… ‘세상을 바꾼 법정’

  • 입력 2006년 9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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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법정/마이클 리프, 미첼 콜드웰 지음·금태섭 옮김/636쪽·2만5000원·궁리

세상을 살다 보면 텍스트(Text) 자체보다 그것을 둘러싼 맥락, 즉 콘텍스트(Context)가 더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

미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 재판(배심제)을 다룬 ‘세상을 바꾼 법정’이 그렇다. 이 책은 캘리포니아 주 차장검사와 페퍼다인대 로스쿨 교수가 안락사, 인권, 여성참정권, 표현의 자유 등 시대적 이슈를 다룬 재판 과정을 전문가의 시각에서 정교하게 담은 책이다.

미국의 이야기라 와 닿지 않을 거라고? 책 표지를 보자. 역자 이름을 보면 이 책(텍스트)은 일순 한국사회 내부로 파고 들어와 콘텍스트가 된다. 책의 번역자가 최근 ‘수사받는 법’을 한겨레신문에 연재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4부 금태섭 검사이기 때문이다. 11일 금 검사가 신문에 쓴 ‘피의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행동지침’ 기고문은 검찰 내부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고 결국 기고는 중단됐다.

이 책은 내년 우리나라에도 시범 도입될 배심원제하에 어떻게 변론과 판결이 이뤄지는지를 독자들에게 미리 체험하게 해준다.

1970년대 21세에 뇌사상태에 빠진 캐런 앤 퀸란 씨 사건. 인간의 죽을 권리에 대한 첨예한 논란을 일으켜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당시 법원은 “국가가 현실적으로 지각을 찾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 식물인간 상태를 유지하라고 강제할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판결했고, 이 판결은 미국, 나아가 세계의 안락사 관념을 바꿨다.

포르노제국의 제왕 래리 플린트와 미국 사회 도덕성의 상징 제리 폴웰 목사 간 소송 사례도 인상적이다. 플린트는 늘 자신을 공격하던 폴웰 목사에 대해 ‘화장실에서 어머니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내용의 패러디 광고를 잡지에 실었고 이는 ‘표현의 자유’ 문제로 비화됐다.

도덕성을 내세운 연방대법관들의 끊임없는 공격에 흔들림 없이 언론 자유를 옹호하는 플린트의 변호인 아이작맨의 변론은 표현의 자유가 승리하는 데 일조한다.

이 밖에 선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프리카 노예들의 인권 문제를 이슈화시켰던 19세기 ‘아미스타드호 사건’ 판결, 1872년 여성 참정권이 없는 상태에서 투표를 해 체포당한 여성운동가 수전 앤서니의 재판 등 세계를 변화시킨 판결들이 제시된다.

무엇보다 이 책을 흥미진진하게 끌고 가는 동력은 바로 ‘변론’. 양측 변호인들이 전개하는 변론을 읽다 보면 마치 법정에 서 있는 듯한 생생함에 몸이 떨린다. 변호인들이 정치한 논리, 예리한 논거로 주장을 관철시키는 모습은 뇌에 알코올을 한 방울 떨어뜨리는 듯한 지적 쾌감을 느끼게 해 준다. 이 책의 판결 상당수가 여러 영화, 소설, 논문, 다큐멘터리의 소재로 이용된 것도 당연해 보인다.

이론에 기초한 법률가의 판단과 상식에 기초한 평범한 사람들의 판단이 합쳐진 건강한 법정, 신념에 찬 법률가들의 논리 대결을 통한 합리적 토론문화. 한국사회에서 가능할까? 우선 이 책을 읽어보자.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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