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칼럼]우리 역사에는 긍정과 대화, 협치와 창조가 보이지 않는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16일 23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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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기울게 한 흑백논리와 보복의 악순환
100여 년 지난 지금까지도 병폐 극복 못해
대화-희생으로 국민 섬기는 자기혁신 시급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
조선왕조를 사회악으로 이끌어 비운을 유발한 두 가지 사상이 있었다. 중간적 현실을 배제하는 흑백논리였고, 그 뒤를 따르는 윤리적 병폐를 만들어준 보복 관념이다. 원수는 갚아야 정의가 되고 은혜는 보답할 수 있어야 선한 사회가 된다는 가치관이다. 완전한 백색도 없으나 100%의 흑색도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것은 그 중간의 회색뿐이다. 짙은 회색에서 밝은 회색을 찾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지속적으로 악에서 선을 찾아가야 한다. 자신도 갖추지 못한 백(白)의 이론으로 회색의 현실 가치를 거부한다면 인간적 삶은 유지되지 못한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원수를 갚기 위해 대립과 폭력을 반복하면 양편 모두가 공멸한다. 악을 선으로 극복하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은혜는 보답해야 한다. 그러나 선을 더 높은 선으로 도와야 공존의 수준을 높여갈 수 있다. 은혜를 갚기 위해 편 가르기와 집단이기주의에 빠지면 부분적 집단이 사회 전체를 파괴한다. 은혜를 갚는다는 것은 공존 질서를 육성시키는 정신이다.

또 한 가지 우리 민족의 병폐를 유발한 사회악이 있다. 반항 의식이 정의라는 역사 속에서 살아온 불행한 유산이다. 조선왕조 때는 왕실과 사회악에 항거하는 것이 불의에 대한 의무와 권리라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대한 항거와 투쟁이 생존과 애국심의 기본이 되었기 때문에 반항과 투쟁을 절대 가치로 여겼다. 일본의 선한 정책이 있었다고 해도 일본의 정치에 찬성하거나 동조하는 것은 국민적 의리에 역행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나 같은 시대의 젊은이들은 정의의 표준이 친일인가 항일인가였다. 최근까지도 그랬다. 우리가 가진 친일파 관념이 그 맥을 따른 것이다. 민주당 일부는 항일정신을 강조하는 것이 정권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주장해 왔다.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을 정도였다.

물론, 자유당의 독재정치와 군사정권의 반민주정치에 대한 항거가 없었다면 오늘의 민주정치는 늦어졌을 것이다. 이런 100여 년에 걸친 의식구조와 가치관을 갖고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동안에 국론과 역사의 정도까지 오도하는 사회 부조리를 수용했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였다. 우리는 지금 또 하나의 동질의 가치관과 대면하고 있다. 공산 사회주의가 안겨 준 정신적 유산의 사회악이다. 북한은 그런 모든 사회악 질환에 빠져 세계에 유례(類例)없는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중국이 그 사회 역사 악의 후진성을 극복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런 역사적 사회악이 냉전 시대와 한국전쟁을 유발했기 때문에 우리는 좌우의 양극 논리를 진보와 보수의 가치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겪고 있다. 그 길은 주어져 있다. 열린 사회로 가는 길이다. 열린 보수가 현 정부와 국민이 원하는 길이다. 폐쇄된 진보는 다시 좌파로 후퇴하기 때문이다. 열린 보수는 공존의 가치와 방법을 찾아야 하고, 폐쇄적 진보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악을 극복해야 한다.

왜 우리는 100년에 걸친 역사적 사회악의 병폐를 재론하는가. 그 정신적 불행을 극복해야 하는데, 깊어 가는 국가 병을 고칠 지도자와 가치관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는 열린 보수 가치를 선택해 봤고, 이번 총선은 진정한 협치가 시대 정신임을 국민이 요청한 결과였다. 누가 어떻게 그 책임과 의무를 감당할 수 있는가. 식견과 인격을 갖춘 지도층이 형성되어야 한다. 모두에게 주어진 국민적 과업에 충실함이 필수조건이다. 공직자다운 공무원, 교수다운 교수, 의사다운 의사, 존경받는 법관들 모두가 제자리에서 자기반성과 새로 태어남의 변화를 갖추지 못하면 희망이 없다.

지금 와서 한두 개인을 지목하고 싶지는 않다. 야당 대표의 발언에 따라 국민의 세금에서 25만 원씩 전 국민에게 분배하라는 주장을 입법화하자는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들고나오는 야당 세력이 있다. 조국혁신당 사람들은 오늘이라도 윤석열 정권을 탄핵하자고 나선다. 그런 자신만만한 지도자가 열 사람이 있다면 국가 질서는 어떻게 되는가. 법치까지 어기고 선한 질서를 배제하면 그 국가는 존립하지 못한다. 의사를 2000명 증원하는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현 정부의 미숙한 행정을 인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사협회 회장의 성명을 접하는 국민의 실망은 크다. 정부가 자신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으면, 전공의들이 환자를 버리고 떠나는 행위도 정당할 수 있는가. 의과대학 교수들은 자신들이 존경받는 인격과 사명보다 집단행동을 불사한다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었던 의사들의 위상을 의심케 한다.

투쟁이 아닌 대화를, 감정과 이해관계를 떠나 객관적 가치를, 분열이 아닌 협력으로 국민을 섬기는 자기반성과 혁신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가는 길은 간단하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국민이 행복하게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가를 찾아 희생정신을 되찾는 일이다. 그 희생의 결과에 따라 존경과 감사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이상인 동시에 의무다.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


#역사#긍정#대화#협치#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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