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가위’ 치료제 나오는데… 국내선 임상 시도도 못해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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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자금에 발목 잡힌 국내 연구
빈혈 치료제 미국-영국 등서 승인… 전세계서 상용화-개발 경쟁 치열
망막교정 기술 보유한 국내 연구팀… 국가 지원 부족해 임상 꿈도 못 꿔
“희귀질환자 위해 적극 투자지원을”

유전자(DNA)를 잘라내 질병을 치료하는 유전자가위 기술을 표현한 이미지. 게티이미지코리아
유전자(DNA)를 잘라내 질병을 치료하는 유전자가위 기술을 표현한 이미지. 게티이미지코리아
난치성 유전질환인 ‘겸상적혈구 빈혈’을 치료하기 위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치료제가 지난해 미국, 영국 등 해외에서 승인을 받았다. 이에 따라 금세기 최고의 생명공학 기술로 각광받았던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활용한 유전질환 치료제 상용화와 개발 경쟁이 본격화했다.

그러나 7일 의과학계에 따르면 유전질환 환자들의 희망으로 여겨지는 유전자가위 치료제 개발이 국내에선 발목을 잡히고 있다. 탁월한 치료 효과를 내는 기술을 구현했지만 규제기관의 요구를 맞추기 위한 투자가 부족해 임상시험에 착수조차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학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국내 유전자가위 치료제 개발 역량이 꽃피우기 위해선 적극적인 지원과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노벨상 수상 유전자가위로 질병 치료 시대 개막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지난해 12월 8일 12세 이상의 중증 겸상적혈구 빈혈 환자에 대해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치료제인 ‘카스거비’를 사용할 것을 승인했다. FDA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치료제를 승인한 첫 사례다. 이보다 앞서 지난해 11월에는 영국 의약품·의료기기안전관리국(MHRA)이 세계 최초로 이 약을 승인했다. 2012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을 처음으로 알리는 논문이 게재된 뒤 10여 년 만에 치료제 상용화가 본격화한 것이다.

유전자가위 치료제는 세포에서 유전질환의 원인이 되는 특정 유전자(DNA)를 잘라내 교정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기존 치료제로는 효과를 보기 어려운 난치성 유전질환 치료 돌파구로 주목받았다. 이론상으로 단 한 번의 치료로 장기간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 기술을 개발한 에마뉘엘 샤르팡티에 독일 막스플랑크 감염생물학연구소 교수와 제니퍼 다우드나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교수는 2020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 글로벌 학계서도 인정받는 한국 기술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분야의 세계적 석학으로 인정받는 김진수 전 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한국 과학자들의 경쟁력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김정훈 서울대병원 교수와 김형범 연세대 의대 교수가 이끄는 공동연구팀이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연구팀의 1차 목표는 희귀질환으로 분류되는 선천성 망막질환(IRD) 치료제 개발이다. 선천적으로 망막세포 유전자에 이상이 생겨 시력이나 빛에 대한 감각 등 다양한 시각 장애를 일으키는 선천성 망막질환은 환자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지만 아직 완치제가 없다.

김정훈 교수가 주도한 연구팀은 앞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술로 새로운 치료법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2019년 연구팀은 IRD인 ‘레버선천흑암시’를 유발한 생쥐의 유전자 돌연변이를 유전자가위로 교정하는 데 성공한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발표했다. 선천성 망막질환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이 확인되면서 당시 국제 의과학계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김 교수와 김형범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2021년 세계 최초로 프라임 교정 기술을 통해 동물모델에서 유전자를 교정하는 데 성공한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네이처 바이오 의학엔지니어링’에 발표했다. ‘4세대 유전자가위 기술’로 분류되는 프라임 교정 기술은 ‘카스거비’에 사용된 유전자가위 기술인 ‘크리스퍼 카스9’보다 정확성과 안전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 임상시험에 착수도 못 하는 혁신 기술


혁혁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국내 연구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인체 임상시험이 수행돼야 하지만 선행 연구에 필요한 비용과 규제가 문제다. 연구팀에 따르면 인체 대상 임상시험 허가를 받기 위한 아데노부속바이러스(AAV) 전임상 시험을 위해 AAV를 생산하는 데만 약 25억 원이 소요된다. 현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범부처재생의료기술개발사업단의 연간 연구비 규모는 재생의료 원천 기술 개발과 허가용 임상시험을 통틀어 12억 원 수준에 그친다.

김정훈 교수는 “현재 국내 대학과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및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의 연구진이 힘을 모으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데 한계에 이르고 있다”고 토로했다. 누구보다 애가 타는 것은 환자와 보호자들이다. 이주혁 소아희귀난치질환환우회 대표는 “유전자가위 치료제는 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환아와 보호자들의 마지막 동아줄과 같다”며 정부의 관심을 호소했다.

박정연 동아사이언스 기자 hesse@donga.com
#유전자가위#겸상적혈구 빈혈#임상시험#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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