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정은]김정은의 14번째 편지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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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남색의 파일 위에 찍힌 금색의 북한 국무위원장 휘장.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낸 첫 친서의 포장은 고급스러웠다. 2018년 2월 청와대를 방문한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문 대통령에게 직접 건넨 친서를 당시 청와대는 공개하지 않았다. 비밀문서라는 김 위원장의 친서는 막상 미국이 먼저 공개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같은 해 7월 트위터에 원문을 올리면서 ‘친애하는 대통령 각하’로 시작하는 친서의 내용과 형식이 알려졌다.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시작된 남북한 정상 간 친서 교환은 끊길 듯 끊이지 않았다. 김 위원장이 21일 보낸 친서는 14번째이자 문 대통령의 퇴임 전 마지막 편지가 된다. 조선중앙통신은 “깊은 신뢰심의 표시”라고 했다. 북한이 최근까지도 남한을 향해 전술핵 사용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느닷없는 살가움의 표시다. 문 대통령을 향해 ‘삶은 소대가리’, ‘겁먹은 개’ 등의 표현을 써가며 비난했던 북한이지만 마무리는 잘하고 싶었던 것일까.

▷직접 쓴 편지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강하다. 정상 간의 ‘친서 외교’는 말할 것도 없다. 김 위원장은 대외활동에 친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문 대통령뿐 아니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도 수차례 편지를 썼다. 트럼프는 김 위원장의 편지를 “아름다운 예술품”이라고 불렀다.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친서를 꺼내드는가 하면, 오벌오피스를 찾는 손님이 있을 때면 봐달라는 듯 집무실 책상 위에 올려놨다. 대통령기록물법 위반임에도 퇴임 이후 27통의 ‘러브 레터’를 사저로 옮겨 보관하려 했다.

▷김 위원장의 친서는 북-미, 남북 관계가 악화하고 있는 시점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정상 간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끈은 놓지 않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히 ‘브로맨스’를 과시했던 트럼프에게 공을 많이 들였다. 해리 해리스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북측으로부터 친서를 받으러 비밀리에 판문점까지 움직이기도 했다. 그러나 친서 전달 20번째가 넘어가면서는 백악관 팀도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실질적 내용 없이 사탕발림이나 아부성 수사가 반복됐기 때문이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아첨의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친서들은 쌓였지만 북한이 협상장에 나오거나 비핵화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할 기미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북한은 올해만 이미 13차례 미사일을 발사했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레드라인까지 넘어버렸다. 풍계리 핵실험장에서는 7차 핵실험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정상 간 친분이 실질적인 진전으로 연결된 것은 끝내 없었다. 사적인 관계 과시에 그치는 친서는 영혼 없는 안부 편지처럼 공허하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김정은#14번째 편지#남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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